[장편] 저주- 잔혹하게 사랑하라 많은 분들이 읽어주셔서 놀랬습니다. 지금 처음 클릭하시는 분들,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읽으신 지금, 지나치게 늦은감이 있지만 앞으로 보실 분들을 위해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몇가지 공지해드립니다. -공지라니.. 어감이 딱딱하군요.;; 다름아니라 '저주'의 외전은 없습니다. 외전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땀 삐질;;;;; 그리고 저는 제 글을 자기자신 외의 사람이 퍼가는 것을 매우죄송하옵게도..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삐질삐질.. 잘난척 하는게 아니라.. 너무 많은 곳에 제 글이 올라가는 것이 쑥스럽기 때문입니다. ;;; 가장 많이 올라간게 개와 고양이인데 사실 그것도 후회하고 있는지라... 키스동과 야파가 공개동이니까 그 정도로도 만족합니다. 그러니까 퍼감에 대해서는 문의하지 말아주세요. 초장부터 이런 엄한 글을 읽게 된 여러분께 송구합니다. 따로 공지드릴 방법이 없어서 부득이 이런 방법을.. 죄송합니다. 삐질삐질;;;; 그렇게 엄청난 글이 아닙니다.;;;;;;;;;;;;;;;;;;;;;;; 제가 엄청 소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만... 헉,헉,헉... 땀이 엄청 많이 나오네요.;;;;;;;;;;;; ------------------------------------------------------------------- 소년은 화들짝 놀라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여자다.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에 달아나려던 발걸음이 우뚝 멈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발끝까지 닿는 검은망토로 전신을 감싸고 있지만 부드러운 목소리 와 아련하게 코속을 휘감는 향기가 절로 소년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노래를 부르고 있었니?" "아.......아니예요!"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소년은 기겁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망토를 벗으며 여자가 미소지었다. 섬세한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물결쳤다.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사마르칸다제국력 68년. 제국의 이름으로 대륙이 통일된지 68년이 지났 다. 세상을 피바람으로 뒤덮었던 정복황제와 그보다 더한 공포와 살육으 로 이름높았던 광황(狂皇)의 치세가 끝나고 현재의 정국은 진정한 후계 없 이 각부족들간의 권력다툼으로 풍전등화의 형국이다. 광황제에게는 후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광황 사후, 가장 가까운 인척으로 후계를 세웠지만 각부족들간의 이해다툼 을 억누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중앙의 피끓는 혈전과는 달리 외 곽지역의 작은 시골마을은 상관없이 평화로웠다. 소년은 전설처럼 들어봤던 황금빛의 머리카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노란색깔의 머리카락은 본 적이 없었다. 말로만 듣던 크세르의 요녀라면 모를까. 하지만 크세르요녀들은 광황제가 모조리 몰살해버렸다고 들었다. 그 미친황제는 끔찍한 저주를 받아서 무 엇이든 닥치는대로 죽였다고 한다. 보기만해도 아찔할 만큼 아름답다는 크세르요녀들은 물론이고, 집시패들과 음유시인들까지 모조리 죽였버렸다. 그의 눈길 한번, 손짓하나에 무수한 생명들이 낙엽처럼 떨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광황제는 저주받았기 때문이다. "노...노래 따위 하지 않았어요!" 소년은 바람에 휘날리는 금빛의 머리카락을 홀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퍼 득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변명했다. 노래에는 악마가 깃들어 있다. 그 악마가 황제를 미치게 했다. 그래서 사마르칸다에서는 노래가 금지되었다. 소년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을 들키는 날이면 관아에 끌려가 당장 목이 잘 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더욱 은은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어쩐지 쓸쓸함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괜찮단다. 나는 외국인이라서 상관없으니까." "외국인이요?" "그래" "그래서 머리카락이 노란거예요?" "그렇단다. 금발머리는 처음보겠구나" "금발?" "노란머리카락을 금발이라부른단다. 금색과 같아서 말이야." "금색.....? 아.........정말 그래요. 금처럼 반짝반짝 빛이나네요" 청결한 아침햇살에 여자의 머리카락이 반짝인다. 오늘 아침부터 나무를 해오라는 엄마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산속으로 들어왔다. 허나 아무도 없는 산속이 조금은 무섭고, 심심하기도 해서 노래를 불렀다. 어른들은 절대로 노래를 불러서는 안된다고 했지만 소년은 어쩐지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았다. 사마르칸다내에서 노래라는 것이 사라진지 이미 십 수년이다. 그래도 바람을 따라 흘러들어오는 노래들이 있었다. 엊그제 몰래 들었던 노래를 마침 혼자 있는터에 가볍게 흥얼거려보았는데 이렇듯 뜻하지 않은 만남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 머리는 크세르인이나 가지고 있는거래요. 저.........혹시..?" 당신은 크세르인입니까? 그렇게 묻고 싶었다. 하지만 광황이후 저주받은 족속으로 멸망해버린 그들의 이름을 입밖으로 내놓기에 망설여진다. 그러나 여자는 소년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의 붉은 입술에 향긋한 미소가 감돈다. "크세르인은 이제 없단다." "아.....그래요. 미친황제가 다 죽였다죠?" 여자의 입에서 명확하게 '크세르'의 이름이 나오자 소년은 망설임을 털어 버렸다. "그 사람들은 이마에 보석을 가지고 있대요. 살아있을때는 굉장히 번쩍 번쩍해서 신기하고 아름답지만 죽으면 빛을 잃고 돌이되어버린대요."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과 부드러운 미소에 완전히 경계심이 사라져버린 소 년이 기분좋게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금발은 크세르인들만 가지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줌마는 어떻게 금발인거예요?" "더 먼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란다." "헤----, 그 나라에선 금발이 많나요? " "그렇진 않지만 가끔 있단다" "와-" 소년이 입을 떡 벌리며 감탄하자 여자가 다가와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 게 쓸어주었다. 굉장히 맛좋은 향기가 스치며 마음속에 따사로움이 퍼져 나갔다. 소년은 여자의 품에 안겨 잠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며 소년의 작은 몸 을 감싸안았다. 따뜻함과 함께 뭐라 말 할 수 없는 포근함이 파고들었다. 엄마보다도 더 따뜻한 느낌이다. "노래를 불러보렴. 아까 부르던 그 노래.." "안돼요...... 노래를 부르면 저주 받아요." "저주?" "네. 악마가 저주를 건대요. 그래서 황제도 미쳤다고 들었어요" 여자는 품에 안았던 소년을 가만히 떼어놓았다. 소년은 여자의 투명한 초록눈동자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아름다운 여자다. 인간이 아닌 것 같아...............숲의 요정이 아닐까? "어째서 황제가 미쳐버렸는지 알고 있니?" 목소리조차 종달새처럼 아름답다. "노래 때문에..." ".........그것은 축복이었단다..." "네?" 아름답기만하던 여자의 초록눈동자속에 슬픔이 어린다. 소년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단다." 아주, 오래전......... 그녀가 그에게 내려준 '선물'이었지. 저주(詛呪) 잔혹하게 사랑하라. -프롤로그- '헉, 헉, 헉-!' 숨이 턱에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져버릴 듯이 요동 쳤지만 소년은 달리 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손에 들린 횟불하나에 시야를 의지한 채 끝없는 어둠속을 그저 달릴 뿐이다. 어른 하나 간신히 통과할 만큼 좁은 통로라 가끔 중심을 잃을때마다 거친 돌벽에 옷이 찢어지기도 했지만 결코 멈출 수 없다. 이 좁고 어두운 통로만이 소년의 유일한 살 길이기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음산한 지하지만 그런것따위에 신 경쓸 겨를조차 없다. 손에 들린 횃불만이 아슬아슬하게 앞을 비추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영원할것만 같은 길이 드디어 끝을 드러냈다. 소년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것 을 노려보았다. 입구는 넝쿨들로 가로막혀있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촘촘하게 엉켜있는 넝쿨들은 횃불이 없었으면 그대로 검은 장막이 되어 소년을 덮쳤을 것이다. -헉......헉......헉....... 숨쉬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심장이 격하게 오르내린다. 저 밖에 어떤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 자신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여기에 있을 수는 없는일, 당장에라도 사마르칸다의 야 만인들이 칼을 들고 쳐들어올 것만 같아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귀신보다도 등골이 오싹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을 내리누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온몸의 신경세포들을 잔뜩 곤두세우고 넝쿨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눈동자만 드러날 수 있게 살짝 펼쳐낸 넝쿨 사이로 조심스럽게 밖을 살펴 보았다. 후덥지근한 지하와는 달리 서늘한 바깥공기가 청량함을 담고 피부에 와 닿았다. 아무도 없다. 소년은 망설이지 않고 넝쿨을 헤쳐 바깥으로 뛰어나왔다. 숲의 차가운 공기가 열이 오른 소년의 육체를 싸늘하게 식혀주었다. 크게 헐떡이는 소년은 숲의 맑고 청량한 공기를 마음껏 폐부까지 들이마 셨다. 그것은 솜털까지 곤두세웠던 긴장감을 삽시간에 이완시키기에 충분 했다. 그러나 무심코 고개를 든 소년의 시야에 저 멀리 손바닥만큼 작아보이는 왕궁이 시뻘건 피를 토하며 화려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휘엉청 밝은 보 름달이 새파랗게 질려버린 소년의 얼굴을 확연하게 비춘다. 지하비밀통로 로 얼마만큼 달려왔는지 시간조차 가늠할 수 없지만 그가 살았던 왕궁이 손바닥만한 크기로 보여지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멀리까지 통로가 이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왕궁은 물론이고 시내의 전경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것 으로 보아 이곳은 산의 정상이 분명하다. 더불어 이만큼의 시야를 확보하 며 왕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은 오직 하나, 세메툴리아산이다. 하이엘프 세메툴리아가 나타르타여신의 부활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는 전 설로 유명한 산이다. 그 성스러운 전설을 간직한 세메툴리아가 이제는 크세르의 멸망을 바라 보고 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은회색의 눈동자에 물방울이 어린다. 자주색으로 변해버린 입술이 분노와 절망을 담고 앙다물렸다. 굳게 쥔 하 얀주먹은 내지를 곳을 찾지 못하고 그저 부르르 떨릴 뿐이다. 흐느낌이나 통곡조차 없다. 붉게 변한 눈동자속에서 투명한 물줄기가 소리없이 흘러나올 뿐이다. 소 년이 그렇게 서 있는 동안에도 왕궁에서 치솟은 불길은 잣아들기는 커녕 더욱 격하게 일렁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에까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것 같다. 덩치가 두배나 큰 시커먼 야만인들에 의해 크세르인들은 갈갈이 찢어졌다. 인간이 아니라 거인이다. 야만인들이다. 입술을 꾹 다물고 그저 바라보고 있기만 하던 소년은 자신의 오른쪽 중 지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소년의 작고 가는 손가락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큰 루비가 정교한 세공을 자랑하며 당당하게 끼워져있다. 또한 그의 이마에도 그와 같은 루비가 '인(印)'처럼 박혀 있었다. 마치 어떤 성결한 신분을 나타내는 증거처럼 말이다. 소년은 망설임없이 손가락의 반지를 위로 치켜올렸다. 달의 음기를 반지안에 다 받아내려는 듯 더욱 높게 올린다. 이어서 그의 굳게 다물었던 입술이 열렸다. "천상의 빛, 축복의 여신 나타르타시여, 그대의 피를 받은 자손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반지에 명명된 그대의 약속에 따라 현신을 부탁드립니다. 제발, 나의 여신이시여-" 단장을 에이는 듯한 소년의 슬픈 외침이 고요하기만한 숲속에 조용히 메 아리쳤다. 얼마후-, 그에 화답하듯이 소년의 작은몸에 바람이 휘감아돌기 시작했다. 보통 자연상태에서의 차가운 바람이 아닌, 따사로움과 포금함이 느껴지는 ...그것은 필시 무언가가 나타나기전의 전조였다. 이윽고 바람이 조금씩 세기를 더하며 소년을 중심으로 넓게 퍼지기 시작 했다. 숲의 나뭇잎들과 수풀들이 바람에 흔들렸으나 광풍이라기보다는 미 풍에 가까운 것으로 고요하게 잠들어 을씨년스럽기조차하던 숲속에 온기 가 넓게 퍼져나갔다. 그 기운을 눈치챈 숲의 작은동물들이 위대한 모신을 맞이하기위해 모여 들었다. 음습한 곳을 좋아하는 맹수 '링가'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두 개의 커다란 송곳니가 입안에 담아두기에는 너무나 벅차 턱아래까지 늘어뜨린 링가의 위용은 커다란 덩치와 함께 바라보기만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흉악하다. 그러나 피빛과도 같은 붉은 눈과 모든 것을 찢어발길 것 같은 긴 발톱이 살기조차없이 묵묵할 따름이다. 그 옆에는 보통때라면 '링가'의 가장 맛좋 은 먹잇감일 '고라니'가 겁도없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인간의 허벅지까지 오는 고라니는 초식동물로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쪽에 속하는 사슴과의 유 순한 동물이었다. 위대한 모신의 성스러운 바람 아래에서가 아니라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 을 기적이다. 그러나 소년은 그것들을 신기하게 쳐다볼 겨를도 없었다. 형형한 빛으로 빛나는 두눈에서 끊임없이 물기를 토해내며 묵묵히 기다릴 뿐이다. 곧이어 바람이 한곳으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차로 길 게 늘어나더니 사람의 형체를 띄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동물들은 물론, 나무와 수풀까지도 고개를 숙인다. 소년 또한 저도 모르게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대가 나를 부른 이 인가? "여신이시여- 여신이시여---" 경외감과 동시에 목이매이는 슬픔 때문에 소년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아까까지 고요하게 내리기만하던 눈물이 이제는 폭포수와 같은 흐느낌이 되었던 것이다. -불쌍한 나의 아들...... 울어라, 너의 슬픔이 잣아들때까지 여신은 다 안다는 듯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울림은 입에서가 아 닌 머리속으로 전달되는 것이었다. 그러자 소년이 드디어 소리높여 통곡 한다. 어린 소년이 내지르기에는 깊은 상처가 느껴지는 울음이었다. 12년을 살아왔던 왕궁이 불에 타고 있다. 1000년을 이어온 찬란한 문화가 야만인의 발 아래 짖밟히고 백성들은 피 를 흘리며 죽어갔다. 남자의 씨를 말리려는 듯한 그들의 무자비함에 거리는 토막난 시체들로 산을 이루고 여인들은 벌거벗겨진 채 곳곳에서 능욕 당하고 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기습적인 야습은 그렇게 '크세르' 1000년의 영화를 손 쉽게 부셔놓았다. 그 와중에 왕가의 마지막 혈통에 대한 대신들의 노력이 소년의 목숨을 살렸다. 사람하나만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비밀통로에 소년을 밀어넣은 대신들은 입구를 철저히 봉하고 야만인들의 칼아래 무참하게 찢 겨죽었다. 다행히 야만인들은 그것이 비밀통로의 입구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고, 소년은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며 쉴새없이 어둠을 달렸던 것이다. 둘째형님도, 첫째형님도 죽었다. 비밀통로로 밀어넣어지기전 전해들은 비보는 소년의 마음을 절망으로 가 득 채우기 충분했다. 사마르칸다군의 야습은 왕족은 물론이고 귀족들의 씨까지 싸그리 불태워 버릴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년은 알 수 있었다. 남아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을. 저 불타는 왕궁안에서 대체 누가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필경 어머니는 물론이고 누이동생들까지 참변을 당했으리라. 아직 나이어린 왕자지만 그정도의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비밀통로에서 나오자마자 그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나타르 타의 반지를 하늘로 치켜올렸던 것이다. 보름달의 정기를 반지에 불어넣 어주면 위대한 여신의 현신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나타르타의 반지의 전 설이다. 그냥 전설로만 내려오던 이야기가 정말이었다는 것에 소년은 감 동과 희열을을 느꼈다. 위대한 모신을 마주했다는 감동과, 어쩌면 저 무자비한 야만인들을 쓸어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열!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 소년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눈물범벅인 소년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으나 강한 의지를 담고 눈앞에 현신한 아름다운 여신을 바라본다. 아무런 장신구조차 없이 긴 금발의 머리를 땅끝까지 늘어뜨린 여신은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천상의 빛이여-, 위대하신 여신님. 부디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눈물을 삼킨 소년이 더욱 형형한 눈빛으로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그러자 여신의 우아한 눈동자에 동정심이 어린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머리속으로 울린 목소리는 더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나는 빛의 신.. 파괴와 죽음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소년의 기대에 완전히 어긋난 것이었다. "그....그렇지만 반지의 약속은-!" -물론, 잊지 않고 있다. 반지를 가진 크세르의 아들 세명에게 한가지씩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나의 약속.. 그것은 내 피를 이어받은 너희에게 주는 나의 작은 축복이니라. 약속은 유효하다. 파괴와 살육, 어둠의 소원만 아니라면 나의 영역에 속한 힘으로 그대의 바 램을 들어주겠다. "1000년을 이어온 내 나라가 불타고 있습니다! 크세르의 역사와 문화를 짖밟고 있는 저들에게 지금 당장 철퇴를 가할 수 없다면 대체 무슨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부모와 형제가 저들의 칼 아래 피를 흘렸습니다! 내 백성, 나의 신하들이 능욕당하고 토막난 채 그 피가 대지를 흠뻑 적시 고 있단 말입니다! 저들을 지금 당장 단죄할 수 없다면 차라리 제 영혼을 거둬가주십시오-! 비참하게 사느니 저들과 함께 숨을 끊어버릴 것입니다!" 절망은 소년의 모든 것을 갉아먹었다. 위대한 여신의 앞이라는것조차 잊은 채 무례하게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치는 일쯤 이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신은 소년의 무례에 그저 한없이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주었다. -크세르의 세 번째 왕자여... 그대의 소원을 말하라. 죽음이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살아만 있다면 못이룰 것이 없는 법, 인내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는 법이다. "소원따위 오직 하나입니다! 저 야만인들을 도륙하는 것,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필요없습니다. 흐...흐흐흑.." 말을 마친 소년이 다시 한번 통곡한다. -군신이 아닌 나는 네게 군사를 내어줄 수는 없다. 신에 가까운 마법의 능력또한 마찬가지... 그러나 한가지, 내 힘에 속한 것을 네게 주마. 그것을 어떤식으로 이용하는지는 전적으로 네게 달려있는일. 현명하게 이용한다면 어떤 군신보다 더 큰 힘으로 너를 도울 것이다. "...무슨.... 힘입니까?" 그제야 눈물이 잦아든 소년이 조금은 기대에 찬 얼굴로 여신을 바라보았 다. 여신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이마에 박힌 피빛의 붉은 보석 에 입맞춘다. 붉고 촉촉한 여신의 입술이 이마의 '인'에 닿자 순간 소년을 채우고 있던 비통함과 절망의 어둠이 거둬지고 대신 포근함으로 감싸인다. 찢어질 듯 하던 심장도 어느새 평소의 두근거림으로 가라앉았다. -사랑이다. "사....랑?" 그러나 여신의 목소리에 어이가없어 오히려 힘이 빠져버렸다. 이 난리통에 사랑이라니? -네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그누구라해도 널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 소년의 입에서 절로 기가막힌 한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여신은 전혀 개의치않고 말을 이었다. -천하제일의 미녀라해도 네가 원하기만하면 스스로 무릎을 꿇어 너의 사 랑을 갈구할 것이다. 천하의 모든 권력을 가진 여왕도 네가 원하기만하면 모든 것을 네게 바치며 사랑을 구할 것이다. 그들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 으라. 사랑에 눈 먼 자들이야말로 너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어 줄 것이 니... 그러나 잊지말라. 그것은 단 한번, 단 한명에게만 통용된다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선택하라. 되도록 네가 사랑할 수 있는 여자로 선택하 는 것이 좋겠지. 네가 원하는 순간, 그 사람은 널 사랑하게 될 것이고 평생 그러하게 되리 라. 이것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나의 힘..... 부디 현명하게 선택하길 바란다. 나의 아들... 내 피를 이어받은 자손이여-, 그대 나라가 사라짐에 나 역시 안타깝도다. 허나 신이 인간계의 일에 참여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금기시 된 일, 반지의 약속이 아니라면 나 역시 이곳에 현신하는 일은 없었을 것 이다. 허나 반지의 약속은 단 세사람에 한번씩, 크세르의 아들 세명에게 만 부여된 선물이니라. 이로서 네가 세 번째였으니 두 번 다시 내가 인간 계에 현신하는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안녕히...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그말을 끝으로 여신은 처음 나타났을때와 마찬가지로 바람이 되어 사라 져버렸다. 그러자 지금까지 여신의 정결한 기운에 경외하며 바라보던 동 물들도 제각자의 터전으로 슬그머니 사라진다. 남은 것은 사라질곳이 없 는 숲과 소년 뿐이었다. 소년은 눈물조차 말라버린 막연한 얼굴로 붙박혀버리듯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타르타의 반지, 반지의 약속. 그것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설이었다. 왕가의 반지로 오랫동안 왕이 될 왕자에게만 전수되었다. 원래의 주인인 첫째형님은 야만인들의 기습을 전해듣고 무슨 생각인지 이 반지를 소년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검을 차고 밖으 로 돌진했다. 형님은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크세르의 마지막임을. 그러기에 소년에게 왕가의 귀물을 전해주었으리라...... 반지에는 전설이 있었다. 음기가 가득찬 만월의 밤에 보름달을 향해 반지를 높게 치켜들고 여신을 부르면 여신께서 현신하시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전설이다. 꽤 낭만적이 고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너무나 오랜세월 왕자들의 손가락안에서만 잠들어있던 터라 모두 가 그냥 전설이라고만 치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 던 소년은 무작정 반지의 전설대로 시행해보았다. 결과는 전설만이 아니 었다는 놀라운 증거로 보여졌다. 크세르의 모신이며 수호신이기도한 빛의 여신 나타르타. 크세르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나타르타의 피에서 탄생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 증거로 왕족의 이마에는 피빛의 보석이 박혀있다. 그것은 뗄레 야 뗄 수 없는 신체의 일부였다. 보통의 인간이 보석을 몸에 지니고 태날 수 없는법, 이보다 명확한 증거가 어디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크세르인은 신의 후손인 것이다. 그런 자만이 결국은 멸망을 부른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소년에게 여신의 '축복'은 전혀 필요없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왕궁이 불타고 수도가 파괴당하고 있다. 크세르인들보다 머리 두 개는 큰 사마르칸다의 야만족들이 미친 거품을 물고 피를 뿌리고 있다. 이 와중에 대체 사랑 따위가 다 뭐란 말이냐------- 여신의 말처럼 훗날 이용할 가치가 있는 소원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다급한 상황에선 도움될게 하나도 없다. 어쩌란 말이냐-? 크세르는 정녕 이대로 멸망하고 말아야 하는가---? 내 나라......내 부모.....내 형제......... 정녕 그들은 이대로 무참히 죽어야 하는가.............. 여신이시여.............. 제발.......... 천상의 빛이여-- 필요없습니다. 사랑따위 사내에겐 필요없는 감정이랍니다. 왜 우리를 버려두시나이까- 버리지 말아주십시오. 당신의 성스러운 피 속에서 태어난 우리가 아닙니까? 제발, 제발 불타게 두지 말아주세요 소년의 절망 섞인 울음이 시커먼 어둠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러나 시뻘건 불을 토하는 왕궁의 불꽃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고 영원히 불타고 있을 것만 같았다. 1. 매가 힘찬 날개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드높은 창공에 올라선 그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의 예리한 눈이 수풀속에서 소리없이 움직이는 자그마한 다람쥐를 포착 해냈다. 그 순간 매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아래로 하강했다. 동그란 호 박색의 눈동자가 수풀속의 한 점과도 같은 다람쥐의 행동반경조차 꿰뚫으 며 눈 깜짝할 새 낚아챈다. 다람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알아채지도 못하고 곧장 하늘 로 비상해버렸다. 다시는 네발로 지상을 밟지못하리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으리라. '멋지구나' 다람쥐의 기구한 운명에 상관없이 고목아래 드러누워 있던 나그네가 조 그맣게 감탄성을 내질렀다. 매의 민첩한 움직임과 정확성은 충분히 감탄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높이 점이 되어 날아가버리는 매의 잔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 은 어쩐지 씁쓸하다. '약한 것은... 강한 것에게 먹힐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인간조차 예외는 아닐지니........ 그렇다해도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마냥 납득하고 살 수 만은 없는 '의 지'였다. 약하고 조잡한 것은 강한것에게 잡아먹히고, 강한 것이 노쇠할땐 되려 약한 것에게 잡아먹힌다. 어차피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이라면 가만 히 앉아서 잡아먹히느니 기회를 노려 잡아먹어 버리겠다. 흑빛의 망토를 둘러쓴 나그네는 엷은 자주색 입술을 일그리며 미소지었 다. 사마르칸다의 수도 마샤카. 가을의 수확을 축하하고 하늘의 신 '무토마라'에게 대제사를 지내는 축제 일이 이틀앞으로 다가왔다. 이때만큼은 시민 모두가 풍요의 과실로 마음껏 취하며 놀고 먹을 수 있 다. 전국 곳곳에서 수확한 농작물들이 마샤카로 이동하고 그에 따라 나라 안의 모든 장사치들이 집결한다. 또한 그들의 암묵적인 비호속에 집시패 들과 음유시인들이 흘러들어와 공연을 펼쳤다. 축제에 노래와 볼거리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름있는 장사치들은 유명한 극단이나 음유시인들을 자신의 재량껏 초청하여 시민들에게 공연 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로인해 소비를 촉진시켜 시장을 더욱 활성 화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다. 축제는 열흘동안 계속되어 마지막날은 잠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술을 마 시며 흥겹게 보낸다. 올해는 대풍이라 모든 것이 넘쳐흘렀다. 그러기에 어느때보다 화려한 축 제가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마샤카 성문에는 안으 로 들어가기 위해 늘어선 줄이 끝을 헤아리지 못할 만큼 길다랗게 이어졌 다. 벌써 며칠째 행렬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길어지고만 있는 것이 다. 며칠째나 야숙을 하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피곤함에 수척해진 모 습이었지만 앞으로 있을 축제에 대한 기대때문인지 불만을 터트리는자는 없었다. 때로 무언가 시비가 붙어 싸우는 자가 간혹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질 서를 지키는 모습들이었다. 이미 해마다 치뤄지는 축제에 암묵적인 질서 가 그들 사이에 자리잡은 탓도 있지만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위압적인 거구와 험악한 인상때문이기도 하다. 샤마르칸다의 병사들은 대부분이 180을 넘는 거구들이다. 병사뿐만 아니 라 여자나 일반이들도 그러한데 그만큼 힘도 셌다. 그들이 대륙을 제패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그에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성안으로 들어가기위한 긴 행렬속에 유난히도 눈에 띄는 화려 한 마차가 있었다. 대상인 아불타의 마차였다. 샤마르칸다의 황제가 대륙을 제패했다면 야불 타는 대륙의 무역을 지배하는 자였다. 그의 손을 거치지 않는 물건이 없 다는 소문이 돌 만큼 엄청난 거물이나 귀족이 아니었던 관계로 일반인들 이 사용하는 서문으로 들어선 것이다. 비록 돈이 엄청난 거부라고는 하지만 샤마르칸다의 엄격한 신분제에는 통용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아불타의 심기는 편치 않았다. 지나치게 뚱뚱한 몸은 이제는 스스로 걷기도 힘들만큼이다. 집안에서 움 직일때도 하인들의 부축을 받아야만 겨우 거동할 정도다. 하지만 마샤카에서 행해지는 축제는 가장 중요한 행사중의 하나다. 그의 거점이 마샤카에서 한참 떨어진 항구도시 루인이었기 때문에 불편한 몸임에도 이곳까지 납셔야 했다. 그 때문만 아니라 그가 여기까지 거동해 야 하는 이유는 더 있었다. 지금은 비록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평민과 노예들이나 이용하는 초라한 서문을 이용하고 있지만 이번에 성사된 막내 딸과 마샤카 귀족과의 혼례는 그의 신분을 귀족으로 급상승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신분제가 엄격한 샤마르칸다지만 오랜 전쟁속에 피폐해진 국고를 충당하 기위해 아무리 평민이라해도 귀족과 결혼을 하고 국가에 엄청난 지참금을 치루기만하면 당당하게 귀족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법이 바뀌었다. 그러므로 걷는것조차 불가능한 아불타라 할지라도 반드시 와야만 했다. 바로 축제 다음날이 자신의 막내딸과 귀족도련님의 혼례일이니까 말이다. 그의 마차 뒤로는 국가에 귀속시킬 엄청난 지참금과 혼례 준비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그것을 호위하고 나선 용병들의 수도 엄청났다. 덕분에 가뜩이나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이 더욱 더 길어진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는 것이다. 벌써 삼일째 자기순번을 기다리던 아불타는 오늘도 지루함을 이기기 힘 들었다. 옆에서 노예들이 부지런히 커다란 부채를 휘두르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는 안그래도 짜증스런 기분을 더욱 배가시켰다. 그 는 옆에 항상 대기하고 있던 노예소년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가인(歌人)께선 무얼하고 계시느냐?" "해사화(海賜花)아가씨와 담소를 나누고 계십니다." "음.... 내가 뵙잔다고 전해주거라. 해사화도 함께 오도록 하려무나" "예이" 아불타의 명령을 받은 소년이 작은 몸을 이용해 재빨리 움직였다. 몇분 후 아불타의 부름을 받은 가인과 아불타의 막내딸 해사화가 마차에 올랐다. 아불타의 거구를 고려해서 마차의 내부는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네 개의 기둥으로 지붕을 받친 모양으로 사방좌우가 훤히 트여진 형태다. "아버님, 또 심심하신가 보군요" 막내다운 애교있는 목소리로 해사화가 다가와 아불타의 뒤룩뒤룩 살찐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아불타가 단추구멍같은 눈을 더욱 가늘게 좁히며 미소짓는다. "지금 이런 상황속에 심심하지 않겠는냐? 너만 아니라면 올 필요도 없을 것을... " "아버님도 차암-. 어차피 대제사에는 매년 참가하셨잖아요? 괜히 제 핑계 대지 말아주세요. 더구나 저 덕분에 서문을 이용하는 것은 이번으로 마지 막이 되지 않겠어요? 딸을 잘 둔 복이랍니다." 옷감이 뜯기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뒤룩뒤룩 살이 찐 아불타와 달 리 막내딸 해사화는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나긋한 허리선은 조금만 잘못 놀려도 꺽어져버리지 않을까 저어될 정도로 가늘고 날씬하다. 그녀는 아불타의 11명의 자녀들 중에서도 특히 빼어난 용모였다. 거뭇한 피부의 샤마르칸다인들에 비해 백옥처럼 하얀 피부도 그러하고 윤기나는 까만 생머리도 그러했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남쪽대륙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쪽대륙의 사람들은 검은생머리와 하얀피부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샤마르칸다인들은 검은 곱슬머리에 구리빛의 피부다. 신분이 높을수록 하얀 피부지만 이처럼 백옥같은 피부는 드물다. 그래서 해사화는 이국적인 이름과 아름다움으로 뭇남성들의 연모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움만큼 자긍심 또한 높았던 그녀는 20살이 되도록 혼례를 올리지 않았다. 여자나이 20이라함은 노처녀의 반열에 오른것이겠지만 날이 갈수록 아름 다움이 무르익어가는 그녀에게 나이란 별다른 장애가 되지 못했다. 오히 려 농익어가는 미에 모든 이들의 가슴을 까맣게 태울 뿐이다. 그러던 그 녀가 드디어 정혼자를 만나 혼례를 올리는 것이다. 아불타의 거점인 루인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마샤카의 내놓라하는 귀족님 들까지 탄식했다하니 그녀의 인기가 어느정도 였는가는 알만하고도 남음 이 있다. 그러나 그녀가 정작 선택한 귀족은 대귀족도 아닌 평범하기 짝 이 없는 보통의 가문이었다. 아무리 아불타라하지만 가장 아끼는 막내딸을 아무 귀족에게나 넘기고 싶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순순히 허락한 것은 사위감이 자신을 능 가할 만큼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귀족이라해도 상인이 못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11명의 자녀가 있는 아불타지만 하나같이 머리는 없고 기름진 배만 있는 자식들에게 뒤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해사화의 약혼자는 달 랐다. 무릇 귀족이라함은 잘난척 거들먹거리기에 여념이 없는 돼지 같은 자들 이 대부분이지만 그는 평범한 자신의 가문 때문인지 야심이 있는 만큼 능 력또한 남달랐다. 가히 후계자로 점찍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자였다. 그리고 또한 누구보다 해사화가 사랑했다. 아불타가 거절할 만한 구실은 별로 없었다. 다른 자녀들의 시기와 모략이 있긴 했지만 굳건한 해사화의 의지를 꺽을 수도 없었다. 해서 이번 혼사가 성사된 것이다. 기쁨으로 행복해하는 해사화에게 아불타는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의 귀한 물건이란 물건은 죄다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특 별한것이란게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고심 끝에 딸을 불러 물어보니 뜻밖 에도 그녀는 한 음유시인의 노래를 부탁해왔다. 결혼식날 그의 노래를 축 가로 삼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소박한 선물이라 하겠지만 아무 음유시인도 아니고 세상천지를 떠돌아 다니는 수많은 음유시인중에 오직 한명, '가인'을 원했다. 남쪽나라 말로 '가인'은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름조차없이 세상을 떠도는데 누군가 그런 이름을 붙여주었다한다. 그 뒤 그의 진짜 이름처럼 사람들은 모두 그를 '가인'이라 불렀다. 그의 노래는 천상의 속삭임과도 같고 그가 타는 하프 소리에 날아가던 새 조차도 눈물을 떨구고 간다고 할 만큼 애절하다고 한다. 아불타역시 그의 소문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사랑해마지않는 막내딸의 소원이었다. 그는 용병들은 물론이고, 어둠속에 숨어있는 도적길드까지 이용해서 가인을 찾아냈다. 그리고 어마 어마한 액수를 제시하여 그를 초대했다. 눈앞에 나타난 가인은 소문처럼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지만 생각보다 남자다운 몸을 가지고 있었 다. 오랜 방랑자답게 허름하고 낡은 옷을 걸치고 있지만 그의 모습에서 드러난 기품은 감출 수가 없었다. 누구든 한번만 보면 내력까지 간파할 수 있는 아불타로서는 그가 몰락한 귀족의 후예이거나 망국의 왕족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문처럼 그의 음악은 아름답고 애잔하기 이를데없었다. 처음 그의 노래를 듣던 날 아불타는 덩치와 나이에 맞지않게 눈물을 끄적 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혼인날에는 그날의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부르겠다는 약조를 받아 내고 여기까지 동행해왔던 것이다. 아불타는 해사화와 함께 마차에 오른 가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호리호리한 몸에 얼굴의 반을 망토로 가리고 있다. 아무런 장신구도 없는 단조로운 흑색망토차림이지만 망토 사이로 살짝 엿 보이는 엷은 자주색의 입술이 상당히 금욕적인 느낌이다. 처음에 입었던 허름한 옷과 망토대신 아불타가 하얀비단의를 권하였으니 그는 간단하게 거절했다. 언 듯 망토사이로 보이는 얼굴선이 제법 미남일 것 같은데 무슨 곡절이라 도 있는지 한사코 망토를 벗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불타도 넌지시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역시 몰락귀족이거나 망국의 왕족....... 그의 프라이드가 얼굴을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리라. "어서오십시오. 피곤하실터에 자주 청해드려 죄송합니다" 아불타는 대상인으로 이름높은 사람이었으나 예의를 차릴 줄 알았다. 비록 자신보다 배는 어린 사람이라고해도 일단 마음에 드는 자에겐 존대 를 쓴다. 그점이 돼지처럼 살만 잡히는 아불타에게 거부감이 아닌 친밀함 을 갖게되는 요인이기도 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폐만 끼치고 있는터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어 기 쁠 뿐입니다." 아불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화답하는 가인의 목소리는 허스키하고 낮았 다. 오랜세월동안 목을 혹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아무 노력없이 그만한 실력을 쌓을 순 없으리라. "아무래도 하루 정도 더 지체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려. 허허허.." 아불타는 사랑하는 딸의 어깨마사지를 받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단추구멍같은 눈과 축늘어진 턱 때문에 상당히 거부감이 들지만 사람좋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예의바른 단어에 가인은 입술만 드러난 얼굴로 살포시 미소지었다. "오늘은 무슨 노래를 불러드릴까요?" ".... 밝은 노래로 한곡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밖의 사람들에게도 힘이 될만한 즐거운 노래면 좋겠습니 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불타의 청에 가인은 투박한 모양의 하프를 조율했다. 그리고 허스키한 목소리에서 나온 소리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 운 음성이 낭랑하게 퍼져나갔다. 그 소리는 길게 줄을 늘어선 사람들의 귓가에까지 울려왔다. 어제도 그러했고, 오늘도 사람들은 노래가 들러오자 약속이나 한 듯이 웅 성임을 멈추며 입을 다물어 버린다. 오직 가인의 노래소리만이 아름답게 울려퍼졌다. 2. 축제전날, 마샤카는 어느때보다도 흥에겨웠다. 모두가 술취한 사람마냥 발갛게 들떠 절로 노래소리가 이어진다. 어느곳 이나 사람들로 넘쳐났고, 곳곳은 꽃으로 장식되었다. 뒷골목을 전전하는 개들조차도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 속에 범상치 않은 분위기의 세명의 남자가 인파를 헤치며 걸어온다. 두명은 설핏보기에도 대단한 미남자로 떡 벌어진 어깨와 허리춤에 찬 대 검이 무사의 신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보다 머리 두 개정도 작아보 이는 소년은 검은색의 망토로 전신과 얼굴의 반까지 가리고 있다. 단지 살짝 보이는 턱선으로 그가 아직 어린나이의 소년일 것이라고 짐작 될 뿐이다. 게다가 좁은 어깨와 살짝 드러난 피부가 백옥처럼 하얗다. 붉은 빛이 도는 입술이 제법 도톰한 모양으로 망토를 벗겨본다면 틀림없 이 미인(美人)일 것이다. 두 남자중 한 남자가 그런 소년을 보호라도 하듯이 좁은 어깨를 감싸안 아 허리춤에 단단히 붙혀 걷고 있다. 나머지 한 남자는 그들의 반보 뒤에 서 걷고 있었는데 매섭게 치켜뜬 눈동자로 연실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이 경호원인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사람들이 자아내는 소음으로 머리가 다 멍멍해질 무렵 문득 소년이 고개 를 왼쪽으로 돌렸다. 소년의 시선에 따라 어깨를 감싸안은 남자의 시선도 그쪽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은 서민들이 주로 애용하는 주점(酒店)이었다. 그러나 작부들의 웃음과 거친사내들의 고성방가로 가득해야 할 주점안에 서 애틋한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년은 홀린 듯이 그 안으로 들어 가려했다. 그러자 남자의 손이 저지한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변성조차 되지 않은 미성의 목소리가 유혹처럼 흥분을 담고 남자에게 말 한다. 남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승낙한다는 의미 로 소년과 함께 주점쪽으로 몸을 돌렸다. 뒤에서 따라오던 호위무사가 뭐 라고 입을 열려했지만 남자가 오른쪽 손을 들어 저지시켰다. 주점의 문이 열리자 거리와는 다른 또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시커먼 피부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사내들이 한 가득 들어차 있고, 그들 의 허리춤에는 가슴의 절반을 드러낸 천박한 옷의 창부들이 아양을 떨며 붙어 있었다. 그러나 왁자한 술주정 대신 그들의 시선은 오직 한곳을 향해 있었다. 테이블은 이미 꽉 찼고, 자리가 없어 서 있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모 두가 하나같이 말은 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산만한 덩치에 군데군데 칼자국마저 훈장처럼 달고 있는 이들은 용병이 분명할터, 그럼에도 고작 노래 하나에 이처럼 넋을 잃다니............... 기가막 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과연이라는 감탄도 함께였다. 그대로 지나쳤다면 이처럼 아름다운 천상의 음악을 듣지 못했으리라. 망토너머 소년의 투명한 초록눈동자에 고아한 자태의 음유시인이 그림처 럼 떠올랐다. 그 또한 흑색망토로 전신을 가리고 있지만 낭랑한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렇게 혼이 빠진 듯이 노래에 집중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을 호위 하던 무사가 주점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앞치마를 걸치고 옆구리에 쟁반을 낀 채 멍하니 서 있는 주인남자를 발견 한 그는 인파를 뚫고 다가갔다. 겨우 주인에게 다가간 그가 나직한 목소 리로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인장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며 곤란한 얼굴이 된다. 하지만 그가 품에서 비단 주머니를 내보이자 금새 고개를 끄덕였다. 단체 최면에 걸린것만 같은 주점안이 약간의 소란으로 떠들석해졌다. 인생에 다시 없을 천상의 콘서트를 감상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일어난 소 음이 반가울리 없다. 용병들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야유를 뿌리자 주 인이 두 팔을 들어 진정시켰다. "죄송합니다, 이제 조용히 할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뒤 한숨과 함께 식은땀을 닦아냈다. 왠 무사양반이 묵직한 비단주머니를 건네주며 자리 하나를 비우라는 말에 얼씨구나 해서 제일 몫이 좋고 다른사람과의 부대낌이 적은 자리를 수배 해주었다. 하지만 이미 앉아있는 용병들이 거칠게 항의한 것이다. 그래서 주인장은 술값은 내지 않아도 좋다는 말로 구슬렸고, 더불어 내일 아침까지 공짜로 해주겠다는 사탕발림에 그들은 못이기는척 자리에서 일 어나 주었다. 그렇지만 나가려는 마음은 전혀 없는지 귀퉁이의 빈 자리에 서서 마지막 까지 콘서트를 감상한다. 그렇게 겨우 자리를 마련한 세 남자의 일행은 편하게 앉을 수 있었다. 주인장은 그들에게 가장 품질이 좋다는 히멜산 적포도주와 고기안주를 내 놓았다. 물론 그로인해 음악감상에 방해를 받은 주방장이 있는대로 인상 을 구기긴 했지만 주인에겐 돈이 우선이었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브라보!" "다시 한번 더 불러보시오!" "앵콜!" 용병들은 사납게 생긴 상판이 무색할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치고 휘파람까지 불었다. 망토너머 소년의 초록 눈동자에도 이슬이 맺혔다. 남자는 그런 소년의 눈가를 자신의 손가락으로 슥 문질러주었다. 소년이 남자를 바라보자 그는 쑥스러운 듯이 미소짓는다. "미란다, 저자를 황궁에 불러줄까?" 황궁의 어떤 화려한 것에도 감동하지 않던 미란다였다. 5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도, 에메랄드 목걸이에도, 대륙너머에서 직수입한 최고급의 비단까지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녀였다. -그랬다. 소년은 그녀였 던 것이다.- 그런데 이름도 출신도 모를 한낮 음유시인 쪼가리에게 진주 같은 눈물을 흘리다니.......... 남자는 가슴속이 저미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나의 미란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그러나 남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란다는 인형처럼 자그마한 얼굴 을 좌우로 흔들뿐이다. "됐습니다. 잠시나마 고향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는것에 만족할 뿐입 니다" "고........향?" 남자의 의문형에 미란다는 잠시 주춤한 기색을 보인다. 그러나 남자에게 속임수란 통하지 않는다. 미란다는 체념하며 사실을 고 한다. "..........방금 그 노래는 제 고향의 노래입니다. " "크세르의.....?" 크세르는 다른나라에 비해 예술이 발달한 나라였다. 다른 나라에서 노래와 춤이란 노예나 집시들이나 하는 하류로 취급하지만 그들은 왕족과 신관들까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특히 음악이 많이 발달 하였는데 악기 종류만해도 100여가지가 넘고, 그들의 노래는 이미 음유시 인들의 단골메뉴이기도 했다. 현재 떠돌고 있는 모든 노래가 크세르식의 음률을 따라 만든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세르의 음률은 세련되었고, 또한 듣기 편했다. 그러했기에 음유시인들은 주로 감정이입이 잘되는 연가(戀歌)를 불렀다. 이미 멸망당하고 종족자체가 말살되어 버린 크세르의 노래를 함부로 부를 수는 없다. 그래서 대신 덜 금기시되는 연가를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고향의 노래'라 했다. 고향의 노래, 그것은 토속노래를 뜻한다. 토속노래는 연가와는 다른 성격 이다. 그렇기에 크세르식 종교개념이 많이 드러나는 토속노래는 거의 전 멸되다시피 한 실정이었다. 크세르식 리듬이 워낙 귀에 익숙해있어서 자각하지 못했던것 같다. 가사마저도 여느 연가와 다를바없이 시적인 문구로 채워져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연인에게가 아니라 여신을 경배하는 노래가 더 옳을 것 같다. 다른 용병들 역시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수많은 크세르식 연가의 한 종 류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만약 알았다면 저리 넋을 놓고 바라보지는 않았 을 것이다. 사마르칸다의 크세르인에 대한 증오는 한 종족을 멸종시켜버 릴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자가 크세르인? 그러나 미란다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다물자 남자도 침묵 했다. 다만 그들의 옆자리에 감히 앉지는 못하고 바로 뒤에 서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던 호위무사가 보이지 않게 미간을 일그렸을 뿐이다. 크세르의 '남자'가 갖는 의미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들의 대화를 알리 없는 가인(歌人)은 앵콜 곡을 시작했다. 마샤카에 있는 아불타의 저택에 도착한 것은 오늘 오전이 조금 지나서다. 오자마자 대충의 요기를 하고 짐정리에 들어갔지만 딱히 가인이 할 일은 없었다. 아불타도 그 나름대로 바쁜 모양이었고, 해사화 역시 혼례복을 입어보는 등 분주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기에 그의 마음은 왠지 조급하고 편안하지 가 않았다. 무엇보다 마샤카가 아닌가?! 대제사의 축제일이 아닐 때의 마샤카는 철저하게 외부의 출입을 통제한다. 사마르칸다인이라도 성문앞에서 반드시 신분검열을 했는데 본토인도 아니 고 외국인.... 더구나 '크세르인'인 자신이고보니 마샤카에 잔입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대거상(大巨商) 아불타가 그를 마샤카로 초대한 것이다. 더구나 모두가 혼잡하고 흥분에 들뜰 대제사의 축제일이다. 아무리 신분검열을 철저히 한다고해도 축제의 혼잡함에는 경계도 느슨해 지는 법. 게다가 성문에 길게 늘어선 줄은 며칠이나 사람을 지치게 만들지 않았는가-. 예상대로 아불타를 알아본 병사들에의해 별다른 수색없이 그 의 이름만으로도 무사통과였다. 사마르칸다의 수도 마샤카는 대 제국의 수도답지 않게 투박한 건물로 둘 러싸여 있었다. 그렇지만 몇 년간의 정복전쟁으로 거리는 풍요로웠고 외 국풍으로 새로 지어진 건물들도 눈에 띄었다. 가인은 아불타의 허락을 얻어 마샤카의 거리로 나왔다. 온통 시커먼 야만족들로 들끓는 마샤카거리에서 크세르인치고는 큰 키였 던 그도 보통체구처럼 보여졌다. 여전히 얼굴과 머리를 가린 그는 주의깊 게 거리의 모습을 망막안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네켈시아르황성. 황비 네켈시아르를 위해 지어졌다는 황성은 멀리에서 보기에도 거대한 위 용을 자랑한다. 그러나 투박한 사마르칸다의 문화를 반영하듯이 화려하기보다는 단순한 모양이다. 하지만 상당히 멀리서도 이렇게나 자세히 보인다는 것은 엄청 난 크기라는 것이다. 결코 만만하게 봐선 안된다. -잊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우리를 짖밟았는지. 얼마만큼 능욕하고 갈기갈기 찢었는지를. 어찌 잊을 쏘냐! 표정없이 물끄러미 바라만보는 가인의 회색눈동자에 우수가 어린다. 물기조차 없이 건조한 눈동자였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세월들이 유수같이 흘러지나갔다. 잠시후 그는 아무일도 없었던 듯 몸을 돌렸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척보기에도 용병들이 자주 드나들법한 주점이었다. 그가 그곳으로 들어간 이유는 노래를 부르고자하는 것 보다 마샤카의 정 세를 알아보기 위함이 크다. 일단 노래로 그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은근히 정보를 얻는 것이 그가 지금까지 해온 방식이었다. 계획은 잘 들어맞았다. 용병들은 스스럼없이 가인을 맞아들였다. "자, 자- 마시라구. 마누라한테도 주지 않는 히멜의 적포도주다. 그래도 자네의 노래에 비하면 이까짓것은 택도 없지만 말이야" 검은색의 덥수룩한 수염을 한 덩치가 가인에게 술잔을 내밀며 껄껄 웃었 다. 벌린 입 사이로 지독한 입냄새가 풍겼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노래를 많이 했으니 이것으로나마 목을 축이게" "감사합니다" 술잔을 받아들며 가볍게 인사하자 검은수염옆에 앉아있던 덩치가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붙인다. 눈가에 길죽한 검상이 있는 자였는데 험악한 생 김과는 달리 고즈넉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허... 노래할때는 꽤 맑은 목소리 같았는데 이제보니 많이 상했구만" "오랫동안 떠도는 인생이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검은수염과 덩치는 일행이었는데 가인이 노래를 마치자마자 이렇게 그들 들의 자리로 이끌었다. 가인은 얼굴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여 포도주를 마셨다. 달콤하고 싸아한 맛이 목구멍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흠....... 먹을때도 얼굴을 가려야 하나?"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던 남자가 가인의 망토를 가리키며 말했 다. 눈초리가 길죽하고 험상궂은 인상이 영락없는 용병의 얼굴이다. 왼쪽뺨에는 길다란 검상까지 있어서 험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반증한 다. 가인은 곤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다지 보기 좋은 얼굴이 아닙니다." "상처라도?" ".............." 질문에 가인이 대답하지않자 긍정의 뜻이라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빨강머리가 끼어들었다. 드물지만 사마르칸다인 중에 이처럼 탁한 빨강머리들이 간혹 있다. "아무리 흉악하다하나 어차피 사내의 얼굴인 것을 한번 보여봐라" 그는 들창코에 여드름 투성이의 얼굴이었는데 부리부리한 눈초리가 제법 매서운 사내였다. "상처가 있다지 않나" 검은수염이 거들었지만 덩치는 꽤 술에 취해있는 듯 지독한 냄새를 풍기 면서 전혀 물러날 기색이 아니다. "혹시 압니까? 엄청난 미색이 숨어있을지-. 어차피 음유시인이라는 것들은 노래를 팔기도 하지만 때론 몸을 굴리기도 한다지 않습니까? 고작 노래 하나로 목숨부지하기는 힘든 법이지, 안그러나?" 그리고는 가인의 목덜미를 감싸안으며 망토안에 훅-,하고 숨을 불어넣는게 아닌가. 그와 함께 참기힘든 악취가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놓아주십시오" 구토가 치미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안고 있던 팔을 치워냈다. 그러자 덩치의 눈에 열기가 치민다. "뭐야, 사내새끼 주제에 면상 한번 보자는데 고깝다는 거냐?!" "그러게말야, 계집처럼 부끄럼 탈 것 없잖아?" 덩치의 동료인듯한 남자가 싱글싱글 웃으며 부추겼다. 그러자 덩치도 힘 을 얻었는지 더욱 기세등등한 자세로 가인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일이 심상치않게 돌아가자 그만 물러가야겠다고 판단한 가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계속 있다간 불미스런일이 발생할 것 같다. "씹! 한번 보자는데!" 그러자 덩치의 둔중한 팔이 가인의 머리를 스쳤다. 정말 한순간의 일이었다. "억?!"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큰소리로 신음을 흘렸다. 옆구리에 끌어안겨 교태를 부리고 있던 창부들조차도 눈을 휘둥굴 뜨고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다시 본 적이 없는 은색의 머리카락들이 허공으로 흩어졌기 때 문이다. "주르님!" 그와 함께 미란다의 작은 손이 남자의 팔을 굳게 잡았다. 망토의 그늘속에서 초록색의 눈이 절망적으로 주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 었다. 주르의 가슴이 다시 한번 찡-소리를 내며 울렸다. 하지만 주르는 절박한 얼굴의 미란다를 모른척 외면하고 음유시인에게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크세르인!" "크세르인이다!" "뭐, 크세르인?" 검붉은 살기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자신들이 눈물지을만큼 감동스런 노래를 부른이가 크세르인이었더란 말인 가? 가인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검은수염조차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빼들 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온 것이냐!!!" "노래로 우리를 홀리려 들어?" "크세르인이었다니!!!" 순식간에 가인을 중심으로 둥그런 원이 형성되었다. 용병들은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며 당장에라도 가인의 목을 따버릴 기세였 다. 하지만 가인은 가운데 물끄러미 서서 눈을 감는다. 마샤카까지 왔다. 오랜세월이 지나, 겨우... 동지들이 다 죽고 없지만 혼자라도 여기까지 왔 다. 이제 곧 계획대로 실행할 찬스가 올텐데 여기서 허망하게 죽어버리는 건가? 왜 좀더 조심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말해라, 크세르인 주제에 어떻게 마샤카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음유시인인척 장사패들 틈에 끼어들어왔겠지!" "아니면 수문장을 꼬여냈다던가..." 험악한 말들속에서 빨강머리가 추잡한 말을 지껄이며 음흉하게 웃었다. "얼굴에 상처가 있다고? 하! 이것봐-, 왠간한 계집년들 뺨치게 생겨먹었잖아? 크세르 기집년들은 하나같이 쫀득쫀득하고 야들야들하다던데 돈 많은 귀 족님들이 다 차지해버리고 우리한텐 잘려진 모가지만 달랑이었잖아? 어때, 기왕 제 발로 찾아온 것, 크세르요녀대신 이것으로 맛을 좀 보는 게.." -------! 굳게 닫혀있던 가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러자 투명한 은회색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떠오른다. "이 새끼가, 꼬나보면 어쩌겠다는 거야?" 그 기세에 빨강머리가 가인의 턱을 손가락으로 치켜들며 이죽거렸다. "...나는 노래를 부르러 온 것일 뿐이오." "하핫! 크세르인 주제에 뭐? 크세르수컷은 발견즉시 사살이다. 이건 아예 짚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데도 마샤카에 고작 노래 하나 부르러 왔다 는 거냐?" "노예일지도 몰라. 귀족님들께선 크세르요녀들을 배양하기 위해 일부러 크세르수컷을 몰래 키운다고 들었어. 이마에 노예의 '인'이 있을지도 몰 라!"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과연 가인의 이마에는 검은색 띠가 둘러져있었다. 그 안에 어느 가문의 노예임을 증표하는 '인'이 있을 지도 모른다. 빨강머리가 띠에 손을 가져갔다. 단번에 잡아 뜯어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그가 목적을 달성하기도 전, 재빠른 가인의 몸놀림이 먼저였다. 그것은 도저히 그냥 음유시인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잔뼈가 굵은 용병들, 몸과 얼굴의 상처만큼이나 죽음쪽에 가까운 삶을 살 아온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조차도 짐작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꼼짝하지마!" 빨강머리의 허리춤에 있던 검이 어느새 가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와 함께 그것은 빨강머리의 목을 찌를 듯이 위협하고 있다. 검을 뺏자마자 가인은 재빨리 빨강머리의 등뒤로 돌아가 목에 검을 들이 댄 것이다. 그러자 모두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움직이면 이 자를 죽이겠다." 아까까지 부드럽게 하프만 뜯던 나약한 모습이 아니다. 죽음을 불사한 결사의 항쟁이 그의 은회색의 눈동자속에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적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좀전까지만해도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찍어대던 선량한 사람들에서 피를 둘러쓴 노련한 살인귀들로 돌변하여 당장이라도 찢어죽일 듯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하....하하.. 그깟놈 죽는다고해서 우리가 손해날 것은 없지." 오히려 웃는다. "마음대로해라! 상관없어!" 고함을 치며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가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흐흐흐... 어리석은 애송아, 사마르칸다를 우습게 본 죄다." 사로잡힌 빨강머리까지 숨죽인 목소리로 비웃는다. "잡아!" "잡아서 사지를 찢어버려!" "육포를 뜨자!" -------------------끝이다! "안돼요!" 여자의 비명이 날카롭게 메아리쳤다. 그와 동시에 찬란한 금발머리가 흉흉한 살기속을 뚫고 지나갔다. 미란다가 용병들 사이를 뚫고 가인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용병들은 또다른 의미로 움직임을 멈췄다. -여자다! -크세르의 -여/자! 크세르의 여자! 사마르칸다가 크세르를 정복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남자들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크세르 남자들의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높을 산을 이룰 때 여자들은 사마르칸다 병사들의 아래에서 알몸으로 누워 마음껏 능욕당했 다. 그녀들은 사마르칸다의 여자들에게서는 없는 자그마한 몸과 순백색의 하 얀 피부를 지녔다. 신비스러운 초록의 눈동자와 오똑한 코, 꽃분홍의 입 술이 바라만 보아도 절로 감탄이 일 정도의 미인들이 많았다. 그러했기에 크세르인의 말살속에서 그녀들 중 일부가 살아남을 수 있었 다. 그들 대부분이 귀족과 황족들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밤마다 그 자그마한 몸을 혹사하며 거대한 사마르칸다 남자들의 정액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차라리 죽는게 나은 삶이다.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경우에는 나이를 먹은 뒤, 더 이상 색노로서의 가 치가 떨어지면 가둬놓았던 크세르수컷과 교배시켜 다음대를 잇게 만든다. 그러다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태어난 즉시 죽임을 당하고 여자아이일 경 우 10살때까지 살려두었다가 어미의 미모를 그대로 빼어 닮으면 30살까지 는 살 수 있다. 허나 아비를 닮거나 미모가 떨어질 경우 가차없이 죽임을 당한다. 사마르칸다인들에게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노예라고 할 형편도 못된다. 철저히 가축이었으며, 몸뚱이 밖에 없는 짐승이다. 데리고 놀다 질리면 버린다. 그러나 그냥 버리긴 아까우니 교배를 시켜 우성유전자를 배양한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 크세르의 '여자'이며 또한 크세르의 '수컷'이었다. -'남자'가 아니다. '수컷'이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가축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의 선택받은 종족 크세르의 마지막 종점이었다. 그러한 크세르의 '여자'가 눈앞에 나타난 것은 일대 사건이다. 크세르 정복전쟁으로부터 10년, 크세르미녀에 대한 소문은 이제는 전설처 럼 굳어져버렸다. 용병들과 같은 미천한 신분으로는 도저히 구경해 볼 수 도, 소유할 수도 없는 미지의 것이다. 꿈에서나마 가능할까? 출세하고 돈을 벌어서 크세르의 '여자'를 사는게 꿈인 용병도 있다. 그만큼 그녀들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었다. "미란다------------!" 그러나 그들이 평생에 한번 볼까말까한 진귀한 요물은 누군가의 방해로 인해 어둠속으로 거둬지고 만다. 미란다와 함께 있던 남자, 주르가 달려와 그녀에게 망토를 씌워준 것이다. "크세르의 여자다! 잡아!" "와아아----------!" 허나 이미 늦었다. 그들은 '여자'를 발견했고, 반응은 상상이상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눈부신 금발과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겁먹은 초 록색 눈망울이 애처로운 요정처럼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저것을 한번이라도 소유해보고 싶다! 이미 몸도 마음도 이성의 지배에서 멀리 떠나버린 용병들은 술기운와 더 불어 맹렬한 기세로 미란다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감히 나의 미란다에게!" 그러나 주르가 품속에서 길다란 장검을 빼들자 사태는 겉잡을 수 없게 되 었다. "주군(主君)!" 호위무사까지 가세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용병들을 베어내며 길을 만들었다. 좁은 주점안, 게다가 지나치게 많은 인간들의 숲을 빠져나오기란 쉬운 일 이 아니다. 더구나 그냥 인간이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들이 다. "미란다, 어서!" 허나 주르는 일체의 물러섬없이 미란다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른손으로는 공격해오는 칼날을 튕겨내고 왼손으로는 미란다를 잡고 있 다. 아무리 주르가 대단한 실력자라해도 이 상황은 녹록치가 않았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미란다는.. "어서 피해요!" 크세르의 '수컷'을 그 조그만 몸으로 감싸고 있었다. "주군! 이리로!" 3. "헉..........헉..헉.........." 겨우 빠져나왔다. 그와같은 아귀지옥을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테렉산이(호위무사) 신기와도 같은 검술로 길을 뚫지 못했다면 주르의 황 금찬란했던 인생은 뒷골목 주점에서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은 용병들을 겨우 따돌리고 '네일란 다리'아래에서 가뿐 숨을 몰아쉬 었다. "헉....헉...괜찮아요? 피가 흘러요" 그런데 기껏 기를 쓰고 구해온 미란다는 자신따윈 안중에도 없이 저 빌어 먹을 크세르수컷에게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물론 자신의 몸에 별다른 상처가 없는데 반해 저놈은 팔에 피를 흘리고 있다. 하지만 연인인 자신을 제처두고 돌봐줘야 할 만큼 큰 상처는 아니 다. "괜찮...습니다...헉..헉.." 크세르놈도 굉장히 지친 듯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얼굴과 몸에 달라붙어있다. 미란다나 놈이나 크세르의 오랜전통상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다. 16세 성인이 되고부터 죽을때까지 절대로 자르지 않는게 그들의 율법이었 다. 그래서 짧은 머리의 테렉산이나 주르에 비해 미란다와 크세르놈은 온 통 머리카락 범벅이었다. 그런데 더욱 염장지르는 것이 미란다가 놈의 머리카락을 직접 정리해주 고 있다는 것이다. 섬섬옥수라 칭송받는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어주고 급기야 소매단을 뜯어 지혈까지 해준다. "미란다!" "네, 주르님?" 한참 그를 닦아주고 치료해주다가 이제야 '거기 계셨습니까?'라는 시선으 로 고개를 돌린다. 화가 치솟았던 주르였지만 너무나 해맑은 미란다의 눈 동자를 본 순간 역정을 낼 수가 없었다. 단지 한숨만 팍 내쉬고 만다. "이분 많이 다치셨잖아요.................." 겨우 주르의 마음을 깨달은 미란다가 조심스럽게 변명하지만.. "난 다쳤는지 관심도 없는 거냐?" 오히려 뾰루퉁한 푸념이 들려올 뿐이다. 미란다는 주르가 아직 18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라는 것을 떠올렸다. 사마르칸다인이라 덩치가 크지만 자신보다 4살이나 어린 소년인 것이다. "황.......아니, 송구하옵니다. 다치신곳은 없으신가요?" "......없다, 제길. (빨리도 물어보는구나)" "주르님........." 아아........미란다........ 그렇게 눈꼬리를 내리며 슬픈 얼굴로 바라보면 난 꼼짝할 수가 없단 말이 다. 주르는 금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크세르인이다. 동족을 만난 것이다. 그녀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주르도 잘 알고 있었다. 남자의 아래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색노. 주르의 비호만 없었다면 그녀는 여러남자들의 조리돌림을 당하며 정액을 옷삼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주르는 약해진 마음으로 슬쩍 미소지어주었다. 더불어 크세르남자에게 상처를 묻는 관대함까지 보인다. "몸은 괜찮으냐?"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였다. 가인은 미란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주르를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호위무사까지 대동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보통의 신분은 아닐터, 그럼에도 일개 색노따위에게 저토록 정성을 쏟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광경 이 아니다. 흡사 사랑하는 연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가?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이며 그의 친절에 감사를 표한다. 사마르칸다인이라고 사랑이란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닐테지. 게다가 이 여인은 여느 크세르미인들과 비교해보아도 손색이 없을만큼 아 름답다. "목숨을 구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무엇으로 보답해드려야 할지요..." "너는 크세르인이냐?" "........그렇습니다." "이상하군. 크세르인이 자유롭게 거리를 다니다니말이야. 망토로 가리 고 있으니 '센'족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다만 들키는 날에는 아까보다 더 한 일을 겪게 될 거다." 센족도 크세르인처럼 하얀 피부를 가졌지만 대부분이 갈색이나 오렌지 머 리다. 더구나 얼굴의 골격이 틀리다. 핏줄이 내보일만큼 투명하고 하얀 피부의 크세르인은 모든 골격이 자그마 하다. 눈이 동그랗고 큰데 반해 얼굴은 손바닥만하고 코와 입도 오밀조밀 하다. 하지만 센족은 크세르인과 마찬가지로 하얀편이지만 눈,코,입이 다 커다랗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어느 종족인지 금새 구별이 가는 것이다.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째서 크세르인이 마샤카에 있을 수 있는 거지?" 잠자코 주변을 경계하던 테렉산이 고저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말씀드렸듯이 노래를 부르러 왔을 뿐입니다." "노래?" 테렉산이 코웃음을 치며 반문한다. "무토마라신의 대제사 날입니다. 음유시인이 이곳으로 몰려오는 것은 당 연합니다." "혼자서 들어오기는 불가능했을터, " "테렉산님............." 더욱 딱딱해지는 테렉산의 질문에 미란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저지한다. 그러나 상관없이 테렉산은 말을 이었다. "네가 크세르인이라는 것을 아는 자냐?" "....그분은 모릅니다. 단지 따님의 혼인식에 저의 노래를 청했을 뿐입니 다." "그럼 혼례식에서나 노래를 부르지 왜 이곳까지 온 것이냐? 목숨이 그리도 하찮더냐?" "테렉산님-" 미란다가 슬픈얼굴로 테렉산의 앞에 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과 함께 비장한 결의까지 내보였다. "저를, 죽이실 겁니까?" 그러나 이어 들려온 가인의 목소리에 미란다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미란다와는 다른 깊이있는 은회색 눈동자가 아무런 감정을 싣지않은 얼굴 로 테렉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돼요....... 안돼요, 테렉산님! 주르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분을 살려주세요-" 다급해진 미란다가 무릎을 꿇고 주르에게 애원한다. "음유시인일 뿐입니다. 음유시인들의 평생 꿈이 무토마라신의 대제사일에 네켈시아르황성에서 노 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도 단순히 그것을 쫒아 여기에 왔을 것입니다. 그 혼자서 대체 무슨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주르님,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미란다의 간곡한 부탁입니다." "미란다." 주르의 미간이 보이지 않게 일그러지고, 테렉산은 지긋이 아랫입술을 깨물 었다. "...............어서 가라. 오늘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라." 온몸에 휘감기던 질투가 미란다의 처연한 얼굴에 의해 씁쓸함만 남기고 사그라든다. 대신 주르는 단호한 목소리로 가인에게 퇴장을 명했다. 그러자 가인은 주르와 테렉산, 그리고 미란다에게 머리를 조아려 감사의 인사를 했다. 사마르칸다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짓은 평생에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 이지만 저 작은 동족의 여인을 곤란하게 할 수는 없다. "생명의 은인에게 영혼 깊이 감사를................ 여..........아니, 무토마라신의 가호를 빌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미란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미란다!" 주르가 푸르딩딩한 얼굴이 되어 외쳤다. 하지만 침착한 표정의 미란다가 슬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자가 여자의 손등에 하는 키스는 청혼이지만 여자가 남자의 손바닥에 하는 키스는 축복의 키스랍니다. 크세르식 작별인사지요. 잘가세요. 부디 몸조심하시길.................." 그리고 미란다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느끼며 가인은 다시 한번 고개숙여 인사 했다. "아름다우신 분........그대에게도 축복을....................." 그것은 슬픈 인사였다. 이미 크세르인에게는 축복도 안식도 없다. 그들의 멸망과 더불어 영원한 지옥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축복을 기원했다. 이미.... 그런 것 따위 없는데. "가자, 미란다." 이미 등을 돌리고 멀어져가는 가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미란다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주르가 말했다. "네................주르님....." 미란다가 조그맣게 말하며 주르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살짝 쳐다보는 곁눈질속에 아무런 표정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테렉 산이 있다. 두 사람은 1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 서로를 마주보다가 금새 시선을 돌렸 다. 결혼식은 상상이상으로 화려했다. 과연 대상인 아불타, 그의 재력에 맞는 결혼식이었다. 마샤카의 내놓라하는 대귀족들과 황족들까지 참석한 이날의 결혼식은 그 날 하루 잡은 돼지의 양과, 최고급 세르히멜포도주의 양, 그리고 창고 가 득히 쌓인 결혼선물들로 이미 화제만발이었다. 또한 한가지,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이 있는데 가히 신이 내린 목소 리라 칭할 수 있는 음유시인의 결혼축가였다. 듣는이로 하여금 절로 감동을 느끼게 하는 그날의 노래는 앵콜을 다섯 번 이나 받고도 끝날 줄을 몰랐다. 결국 서로 자기집에 초대하고 싶다는 신청이 물밑듯이 들어와 곤혹을 치 루기도 했는데 이날 최대 귀빈 헷소르재상의 제의에 의해 모든 초대장들 이 무효가 되어 버렸다. 바로, 황궁으로의 초대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음을 그대로 썩히기는 아깝구나. 축제일내내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너의 재주를 보여주려무나." 황궁의 연회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음유시인으로선 최고의 영애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황공하옵니다." 가인은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여전히 흑색의 망토차림이었지만 얼굴에 보기흉한 상처가 있다는 것으로 간단히 무마할 수 있었다. 4. 네켈시아르 황궁. 30년전만해도 열다섯개의 부족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마르칸다가 정 복황제 하이넨샤에 의해 통일을 이루고 이어 대륙 정벌에 나섰다. 그리하여 가장 치열하게 저항하던 크세르의 정복과 함께 긴 전쟁은 사마 르칸다제국의 건설과 함께 끝이 났다. 크세르와 사마르칸다는 전통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크세르는 전통과 문화가 가장 오래된 종족으로 신의 선택받은 종족이라는 선민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열다섯부족으로 나뉘어 항상 자 기들끼리 싸움질을 하고 있는 사마르칸다를 야만인이라 업신여긴 것은 당 연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대륙을 통일하다시피한 나타르타여신을 숭배하는 크세르와 하 늘신 무토마라를 숭배하는 사마르칸다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 이었다. 그리하여 크세르정복후, 대륙의 나타르타여신의 신전은 모두가 파괴되었 고, 수많은 신도들이 개종, 혹은 몰살당했다. 그와중에 나타르타여신의 가장 큰 상징인 크세르인의 대대적인 인종말살 은 사마르칸다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스스로를 여신의 후예라 칭하는 만큼 그 상징성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 다. 먼저 노약자와 남자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죽었다. 갓난아기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이마에 피빛 여신의 증표를 갖고 있는 왕족들은 이미 전쟁의 와중에 모조 리 몰살당했다.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민족인만큼 그들은 싸움와중에 죽 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그 어미가 직접 숨을 끊어놓았다.-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5백만에 달하던 크세르인이 멸종되었다. 남아있는 크세르인은 거의 대부분이 여자들이지만, 혹시 어느 귀족집에 씨 배양용으로 수컷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각되면 수컷은 당장 주살(誅殺)이다. 그나마 여자들은 30살까지 삶이 보장되지만 그 이후에 그녀들의 운명역시 수컷들과 마찬가지로 주살이다. 그것이 바로 크세르인의 현재 모습이었다. 가인은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빗었다. 은백색의 머리카락이 지금은 염색으로 인해 갈색빛으로 물들어 있다. 지 난번 주점에서의 실수를 생각하면 철저히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는 금발의 찬란한 머리카락이었것만 10년의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어 느절에 20대의 나이임에도 은발이 되어버렸다. 투명한 은회색의 눈동자 역시 젊은 나이에 맞지 않은 깊은 심연이 담겨 있다. 그는 긴 머리를 센족스타일로 틀어올렸다. 센족은 머리에 상투를 트는 것으로 유명하다. 언제나 센족으로 위장하고 다녔기에 상투트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크세르인치고 큰 키와 골격으로인해 센족으로 위장하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머리를 다 틀어올리고 검은색의 띠로 이마를 둘렀다. 아침의 태양빛을 받아 더욱 붉게 빛나던 보석이 검은색의 천에 의해 감춰 졌다. 이것은 증거다. 누구라도 한번에 알아볼 수 있는-, 그가 마지막 크세르의 왕손이라는 것. 머리를 틀어올리고 이마에 띠를 두르자 그는 영락없는 센족이었다. 물론, 투박한 센족에 비해 좀더 섬세한 이목구비다. 단지 은회색의 눈동자가 센족에겐 없는 것이라는이 흠이다. 크세르에도 은회색의 눈동자는 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망토가 필요 한 것이다. 이마는 띠로 가린다지만 눈은 가리면 앞을 볼 수 없다. 위급할때는 장님 흉내를 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네켈시아르황성을 잘 보아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을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려왔던가! 그는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 해온 낡은 하프를 만지작거렸다. 크세르의 마지막 밤, 그 지옥같은 아비규환속에서 지하비밀통로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는 오랫동안 산을 배회했다. 배고픔과 탈진으로 거의 죽기 일보직전, 기적적으로 크세르반군을 만날 수 있었다. 학살의 와중 가까스로 살아남은 병사들이 규합되어 만든 조직이었다. 크세르인에게는 투항이란 없었다. 이미 인종말살 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 투항한다해도 어차피 죽음이다. 사마르칸다에 의해 전대륙이 통일된 지금 크세르인을 받아줄 땅도 없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차라리 저항하다 장렬히 죽는 것을 택하겠 다. 자존심강한 크세르인들이 택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이었다. 그를 발견한 반군들은 왕손이 살아있다는 것에 대단히 고무적이었다. 당장 아무런 희망도 없것만 마치 백군만마라도 얻은 듯이 기뻐했다. 그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이미 복수심으로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던 그는 기꺼이 그들과 함께했다. 그러나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왕자로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검술과 무도를 배우긴 했지만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사마르칸다병사들의 눈을 피해 토굴로 숨어 다니는 것이 그 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성인식을 받을 16살이 될 무렵, 그는 한사람의 성인 으로서 자신의 할 일을 찾아냈다. 그것이 바로 '노래'다. 원래부터 크세르인들은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신의 경배일에 귀족들로 이루어진 소년합창단이 노래를 부르고, 그중 가 장 특출난 소년이 독창을 하기도 하는데 그는 대표로 뽑힐 만큼 출중했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왕자로 태어나 노래를 부르며 구걸한다는 것은 수치이 며 굴욕이다. 허나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때가 아니다.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소신을 밀고 나갔다. 그리하여 그는 이름없는 음유시인으로 대륙을 방랑하게 된 것이다. 이름없는 주점과 귀족의 성에서 노래를 팔고 약간의 돈과 정보를 얻는다. 그것을 크세르반군에게 전해주어 때로 무기를 탈취하고 소규모 전투를 벌 이며, 혹은 사마르칸다의 매서운 포위망에서 도망치기도 했다. 그것이 천상의 노래를 부른다는 가인의 정체였다. 허나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10년에 걸친 항쟁이 바로 1년전, 토벌작전으로 마지막 한명까지 몰살당해 버렸다. 이번에도 그는 자신을 지켜주는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도망칠 수 있었다. 이번에도...................그는.......도망쳤다. 수많은 피, 찢겨나간 육체....... 그것이 강을 이루고 산을 이루었다. 반복되는 죽음........ 그리고 도망................... 내가 왕자였던가?! 내가 그들의 왕이었더란 말이냐! 헌데 나는 저들의 시체를 밟고 도망만 친다. 백성과 군사가 없는 왕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죽으려고 했다. 구차한 인생...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그의 절망은 크고 깊었다. 차라리 미쳐버리길 원했다. -천하의 모든 권력을 가진 여왕도 네가 원하기만하면 모든 것을 네게 바 치며 사랑을 구할 것이다. 그들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으라. 사랑에 눈 먼 자들이야말로 너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어 줄 것이니... 문득 보름달 아래 현신하여 그에게 축복을 내려준 여신의 말이 떠올랐다. 사랑? 허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한 아주 대단한 것이기도 하다. 몇번이나 여신의 축복을 사용하려 했는지 모른다. 동료들이 배고픔으로 쓰러져갈 때, 거리에서 크세르인임이 들통나 맞아죽 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진정으로 권력을 쥔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 하게 되길 바랬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한 일은 없었다. 적합한 여자가 없었음도 이유지만, 애꿎은 여자까지 자신의 운명에 휘말리 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마르칸다는 이미 대륙을 통일했다. 그에 맞설만한 적수는 전무하다고 해도 옳다. 아무리 권력을 지닌 왕이라해도 황제에게 맞선다면 곧 파멸이 다. 그녀역시 자신과 같은 지옥도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어리석다.....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아직도 이런 나약한 마음이 남아있다니... 지금같은 상황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마땅할터이다. 하지만 그의 마 음속에는 어찌할 수 없는 심약함이 아직도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다. 이 지옥도는 나 혼자서 걸어갈 것이다. 그러나 해사화를 본 순간 그의 결심이 잠시 흔들렸었다. 그녀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똑똑하고 강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대거상으로 사랑해마지않는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위인이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기만하면 아불타는 기꺼이 사마르칸다를 향한 칼자루에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하지만......... 모든 동료가 죽고 없는 지금, 사마르칸다에 저항한다한들 무슨 소용이랴... 게다가 저리도 행복해하는 그녀에게 할 짓이 아니다. 잊자. 어차피 소용 없는 축복이다. 아무리 숭고하고 아름다은 것이라해도 사내에게 그것은 사치이며 쓰레기 일 뿐이다. 가자. 내정된 운명으로. 기회는 단 한번 뿐이다. 그는 망토를 둘러쓰고 낡은 하프를 소중히 품안에 안았다. 어떤 난리속에서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은 애장품이다. 가자, 네켈시아르- 원수의 품으로. 5. "내 평생에 저리 아름다운 것은 본 적이 없었다네" "그렇게나 예쁘단 말인가?" "예쁘다뿐인가! 나타르타여신인가 뭔가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현신한것 이나 다름없다네" "쉿! 어딜 불경한 이름을........." "아... 그래. 무토마라신의 경배(敬拜)속에서 이교도의 신을 입에 올렸다 간 당장 목이 날아갈 일이지. 암, 조심해야지. .........하지만 그처럼이나 아름다웠다네" 막 연극을 마친 집시패들이 대기실에 모여들어 크세르의 요녀들을 본 감 상을 떠벌렸다. 분장으로 뽀얗게 흐려진 얼굴속에서도 꿈꾸는 듯한 눈과 발그래해진 뺨이 어지간히 흥분해 있음을 알려준다. "자네차례라네, 어서 가보아. 하지만 명심하게. 요녀들의 미모에 한눈을 팔다간 병사들에 의해 경을 치 고 말 것이야. " "아.. 알았네. 어휴.. 원 떨려서.........." 다른집시패들이 준비를 할 동안 한구석에 웅크려 앉아있던 가인은 가만히 하프를 조율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흑색 망토대신 아불타가 선물로 준 흰색 망토를 입고 있는 그는 거무잡잡 하기만 집시패들속에서 확실히 돋보였다. 그러나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만 앉아있어 모두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다. "황제폐하도 납셨다는데 어떻던가?" 센족으로 보이는 음유시인이 긴장한 목소리로 집시패들에게 물었다. 가만히 앉아만있던 가인의 어깨가 움찔 움직인다. 하지만 계속 하프를 조 율하는 척 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굉장히 젊으신 분이라 알고 있는데.... 선대황제의 외아들이라고 들었소 만, 어떻습니까?" "뭐, 하이넨샤황제께서 하도 전쟁에 많이 출정하셔서 혈손이 그분 한분뿐 인건 맞소. 내 어찌 감히 황제의 용안을 바라볼 수 있겠냐만, 납신 것은 사실이오. 내 떨려서 죽는 줄 알았소" "허어-, 황제께서도 관람하시다니, 광영이 아닌가! 3대까지 자랑할 일이군요!" 그러자 곁에서 듣고만 있던 다른 집시가 끼어들었다. "내 자세히는 못보았지만 슬쩍슬쩍 곁눈질로 보았는데 굉장히 잘생기셨 두만요. 떨벌어진 어깨하며, 양쪽에 크세르요녀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는 데 기가막히게 어울리더란 말이오. 대체로 사마르칸다인들은 우락부락하 게 생겨서 크세르요녀과 있으면 미녀와 야수가 연상되는데 정말 왕자처럼 딱 어울렸다오. " "아, 소문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황제폐하와 크세르요녀와의 핑크빛 염문이 있다던데 그게 참입니까?" "쉿!,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시오. 감히 어찌 황제와 요녀를 한데 엮는단 말이오?" "하지만 소문으로는 황비마마보다도 요녀를 더욱 아끼신다고.." "어허, 그래도 이사람이..................." 집시가 연신 두려운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음유시인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신 다른 음유시인이 끼어든다. "이미 마샤카의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얘기를 쉬쉬할거 뭐있소? 이미 우리 음유시인들 사이에서도 황제와 요녀의 연가가 암암리에 퍼지고 있는 형국이잖소" "그...그렇지만 여기는 네켈시아르황궁이 아니오? 입조심하지 않으면..."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같은 것들에게까지 무예 그리 신경쓰겠소?" 아닌게 아니라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들은 집시패의 여자들과 시시덕거리 느라 여념이 없다. "현재의 황제는 상당히 온유한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선황인 하이넨샤황제가 피의 정복왕으로 상당히 거친 성정을 지녔지만 그 아드님이신 주르피오황제께선 노예제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어 진 성품이라고 하더군요" 그의 말에 집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같은 하천한 것들이 마샤카에 들어와서 공연을 하려면 여러 가 지 제약들이 있는데 많은 부분 완화시켜주기도 하셨지요. 확실히 사마르칸다의 거친기질과는 다른 분 같소." "어쩌면 싸움만 좋아하는 사마르칸다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주실지도 모르지" 음유시인이 은은한 미소를 띄며 대기실 너머 연회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헷소르재상의 추천으로 온 자가 누구냐?" 대기실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사이 붉은제복을 입은 시종이 다가와 외쳤다. "누군데 이름도 없이... 아, 너냐? 어서 와라, 차례가 되었으니까." 가인이 말없이 몸을 일으키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렸다. 모두의 눈동자속에 '저자가 헷소르 재상의 추천을 받았다고?'라는 부러움 이 담겨 있었다. 연회장에는 무기지참이 금지된다. 이미 황궁으로 들어올 때 한차례 몸수색을 마친터지만 연회장 입구에서 한번더 몸수색이 있었다. 망토까지 벗어야 했는데 병사들은 가인의 얼굴 을 보며 고개를 갸웃 했지만 다행히 갈색 머리라 통과할 수 있었다. -센족인가? 그런데 센족중에 저런 눈동자를 가진 자가 있나? -아무렴 어떤가. 헷소르재상께서 추천한 자인데 별일이야 있을라고. 하도 튀기가 많으니 그런 종자겠지. 다행히 병사들은 센족과 크세르인의 특성을 용병들처럼 제대로 알아맞추 지 못했다. 귀족들이 소유한 크세르의 여자들은 허락되지 않은 곳에서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가리고 다닌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말살의 최전 선에서 활약 한 용병들에 비해 궁궐안에서만 생활한 경비들은 크세르인과 센족의 특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식으로 첫 번째난관을 통과했던 가인은 이번의 두 번째 난관도 무사 히 통과했다. 머리를 물들이고 상투를 튼 것이 정말로 다행이다. 시종을 따라 붉은색의 복도를 걸으며 가인은 망토를 더욱 깊숙히 눌러 썼 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점점더 가까워질수록 은은한 향기가 강도를 더해간 다. 복도의 끝, 가인을 안내한 시종이 붉은 커텐을 젖히자 거대한 홀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망토속에 가려진 가인의 하얀 얼굴에 놀라움과 경악이 떠올랐다. 마을의 한 부락을 연상케하는 어마어마한 홀과 그 안에서 뒹굴고 있는 짐 승도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대륙 각지에서 진상된 보도듣도 못한 산해진미와 악공들의 은은한 선율, 코끝을 자극하는 사향냄새와 벌거벗은 사람들. 그들 중 어느 하나 제대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난교파티다. 마치 뱀들이 단체교미를 하는 것 처럼 살색의 덩어리들이 곳곳에 뭉쳐있 다. 서로의 몸을 비비고 거침없이 음부속에 자신의 분신을 박는다. 이미 수치도 굴욕도 없다. 한명의 남자에게 두세명의 여자들이 달라붙어 온몸을 애무하고 기꺼이 거 대한 음경을 입안에 담는다. 마치 꿀발린 사탕마냥 적극적으로 핥고 빨아 대는 그녀들의 얼굴에는 고통보다는 쾌락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곳에는 남녀노소가 없었다. 거동조차 불편할 것 같은 비쩍마른 노인도 한손에는 세르히멜 포도주를, 또 한손에는 손녀보다도 더 어린 벌거벗은 소녀를 안고 있다. 그녀는 노인이 마치 세상 다시 없을 미남이라도 되는양 교태로운 웃음을 선사한다. 기둥에 양 팔이 묶인 여자는 사정없이 채찍을 맞으면서도 쾌락의 신음을 내보냈다. 오히려 허리를 비틀며 더욱 담대하게 유혹한다. 검은 구릿빛의 중년인은 신이나서 채찍을 마구 휘둘러댄다. -아하하하......... -오호호호.......... 어떤 곳에서는 벌거벗은 여자의 몸위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남자들로 하 여금 혀만을 사용하여 먹게 한다. 남자들은 서로 여자의 음부와 유두에 있는 음식을 먹겠다고 난리들이다. 혹은 한 여자를 탁자위에 올려놓고 두명의 남자가 동시에 추삽질을 한다. 이미 한계까지 벌려진 다리가 곧 찢어져버릴 듯이 애처롭다. 그럼에도 여 자는 자지러진 신음을 흘리며 웃어댔다. 어디를 보나 여자, 여자들....... 모두가 짙은 화장과 아름다운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지만 어느 누구하나 천을 두른이는 없다. 오히려 남자들로 하여금 흥분을 느끼기 좋은 부위에 보석을 둘러 더욱 성적인 면을 강조한다. 하얀 살결속에 젤리처럼 새빨갛게 칠해진 유두가 당장에라도 잡아 뜯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다. 심지어 피어싱으로 꿰뚫어 놓은 여자들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인의 마음을 참담하게 만든 것은 그녀들 거의 대부 분이 크세르인이라는 것이다. 하나같이 요염한 그녀들은 짙은 웃음과 거침없는 손놀림으로 사마르칸다 의 원수들을 천국으로 이끌고 있었다. 크세르의 요녀(妖女). 그것이 나의 누이......내 혈족, 살아남은 그들이다. -누이동생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얼굴이 예쁘니까 어쩌면 아직도 살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쫒기던 어느날, 밤하늘에 걸린 붉은 만월을 바라보며 눈물짓던 어린병사가 그리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읖조렸다. 그의 때에 절은 초췌한 얼굴과 쾌락과 열락의 화장으로 얼룩진 그녀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망토의 긴 자락안에서 주먹이 흐느꼈다. 목구멍 위까지 차오른 심장이 지금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듯이 거칠게 맥 박한다. 죽여버리고 싶다는 분노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자신 의 무력감. 그래, 내 죄다. 지켜주지 못한 죄. 못난 사내의 죄. 무능한 통치자, 무능한 왕....... 내가 너희의 왕이었다. 마지막.......왕손이었다. 오늘 여기서 내가 죽어 너희의 수치를 받아주겠다. 호호호호호................ 아.......아하하.. 하하하하......... 여인들의 달뜬 웃음소리가 언제까지고 메아리친다. 둥근 원형의 홀의 중앙을 가로질러 십자모양의 길이 있고, 그 정 중앙에 무대가 있어 사방좌우에서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무대에서는 벌거벗은 무희들의 현란한 춤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녀들이 머리를 땅끝까지 조아리며 인사를 마치자 가인의 차례가 왔다. 하얀 망토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러쓴 그가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이미 크세르의 여인들과 열락에 빠져있는 사내들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어차피 연극이니 노래니하는 것들은 분위기를 돋구는 장치일 뿐, 난교파티에 소용될 것이 없다. 그러나 가인은 낡은 하프를 품안에 쥐고 당당하게 걸어갔다. 드디어 무대의 중앙에 이르러 황제가 앉아있을 방향으로 머리를 숙였다. 황제가 있는 단상은 보통귀족들이 뒹굴고 있는 곳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 다. 일부러 고개를 들지 않는 한 보이지 않는다. "이자가 헷소르재상께서 추천한 잡니까?" 열락의 신음속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자 혼탁하게 흐려져 있던 실내가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여인의 음부만 파먹고 있던 시선들이 일제히 황제가 계신 곳과 머리를 조 아리고 있는 가인에게로 향한다. 음유시인에게 황제가 관심을 보인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아불타의 혼례식에서 보았는데 실력이 정말 기가막혔습니 다. 천상의 목소리라 칭한다지요." 황제보다 한단 아래에서 크세르요녀의 애무를 받고 있던 헷소르가 붉어진 얼굴을 가다듬으며 답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에 관한한 관대한 사마르칸다에서 이와 같은 난 교파티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황제건 가장 말단의 신하건 한자리에서 같은 여자를 품는다해도 문제될 것이 없을 만큼 개방(?)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것은 남성들에 게만 통용되는 이야기다. 여자들은 그녀들만의 연회를 개최하는데 난교파 티보다는 사교파티에 가깝다. "호오.. 그렇습니까? 헷소르재상께서 그와같이 평하시다니 조용히 경청 해야 겠군요" 사마르칸다인치고 온유한 성격의 황제라더니 과연 그러한 것 같다. 낮은 웃음이 내포된 그의 목소리는 거칠기만한 사마르칸다인의 목소리보 다 톤이 낮으면서도 온화하다. 하지만, 이 목소리....... 왠지 낯이 익다. 한쪽머리에서 떠오른 의심을 무시하고 가인은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위대하신 황제폐하께 미천한 저의 목소리를 들려드릴 수 있게 되어 영 광이옵니다. " 가인의 인사가 끝나자 황제가 세르히멜포도주를 한모금 마시며 명했다. "시작하라" 황제의 명이 끝나자 가인은 섬세한 손가락으로 하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디리링.... 하프의 맑고 단아한 음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넓은 실내에 울려퍼졌다. 여자의 음부속에서 절정을 맞이하던 사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두명의 남자를 한꺼번에 받으며 웃어대던 여자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 졌다. 대신 열락으로 흐려져 있던 그들의 눈동자에 하얀 망토를 입은 음 유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청각을 비롯해서 심장까지 직격해오는 천상의 목소리와 함께. ******* "그만." 황제가 손바닥을 세우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제에게 향 한다. 태어나서 이처럼이나 슬픈 곡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새삼 노래를 중단시킨 황제에게 야속한 기분이 든다. "즐거운 노래는 없는가? 이처럼 흥겨운 날 죽음을 연상케하는 어두운 노래는 분위기를 망칠 뿐이 다." 황제의 명에 가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숭고한 연회장에서 어두운 노래로 마음을 어지럽힌 점 사죄드리겠나이 다. 미천한 소인이 미처 생각지 못했나이다." "연가를 불러보아라.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사랑찬가'는 어 떠한가?" 헷소르재상이 붉어진 눈가를 슥 훔치며 말했다. 이미 질곡의 나이에 들어서 왠만한 일에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는 그였 것만 천상의 목소리앞에선 그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나보다. "명대로 하겠습니다...........헌데......미천한 소인..... 감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 다." "무엇이냐?" 뜬금없는 가인의 말에 헷소르재상이 느긋한 얼굴로 물었다. "이 노래를 황제폐하의 가장 소중한 분께 바치고 싶나이다. 곁에서 부를 수 있는 영광을 주시온다면 이 몸 여기서 죽어 가루가 된다 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 가인은 무릎을 꿇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천한 주제에 황제폐하께 무슨 말짓거리냐!" 취기로 코끝이 빨갛게 변한 젊은 귀족이 소리쳤지만 황제는 가벼운 손짓 으로 그를 물리쳤다. 대신 사마르칸다의 모든 여성들을 울리고도 남을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곁에 앉아있는 금발머리의 여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할까 미란다"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자 미란다의 하얀 얼굴이 가볍게 붉 어진다. 그녀는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벗은 몸이 부끄러운 듯 양팔로 가슴을 가리며 웅크렸다. 하지만 아련한 눈동자속에 바닥에 업드 리다시피 무릅꿇고 있는 가인의 모습이 비친다. 그녀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제의 부드러운 입술이 사랑스럽다는 듯 그녀의 입술에 쪽 소리 를 내며 키스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대신들과 여러귀족청년들이 미미하게 인상을 구겼다. 분명 '요녀 주제에..'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들도 크세르의 요녀들을 끼고 앉아있으면서도 황제의 일방적인 총애 를 받고 있는 미란다의 존재는 굉장히 거슬렸다. 너무나도 노골적인 황제의 요녀에 대한 총애는 이미 한도를 넘어위험스러 울 정도다. 저러다 덜컥 요녀가 임신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골 치아픈 두통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굉장히 기분좋은 얼굴로 가인에게 명한다. "가까이 오라" 황제의 명에 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왕이 계신 단상위로 올라갔 다. 20개의 계단 위에 재상 및 1품 대신들의 단상이 있고, 5계단 위에 황 제가 있다. 가인은 조금의 실수라도 있을새라 조심조심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손에 들린 하프의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슥 훑는다. "길가에 굴러 다니는 돌멩이보다 미천한 소인이 감히 황제폐하를 이처럼 가까이 배알할 수 있다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부디 만세의 지복을 누리소서..." "하하하... 돌멩이보다 미천한 인간이란 없다. 그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재능이 있을진데 지나치게 자신을 비하는게 아니다." 미천한 소인........................ 입이 썩고, 내장이 새카맣게 타오른다. 모든 왕족들이 몰살당한 지금 혼자남은 그는 크세르의 왕이었다. 하지만 미천하다 말하고 있다. 내 부모, 형제 자매를 죽인 원수에게 스스로를 길가의 돌멩이보다 못하다 낯추며 굽실거린다. 누더기를 걸친 왕. 창녀들의 왕.................. 가인은 요동치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가만히 하프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생애 마지막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푸른 나무가지의 종달새처럼, 새벽의 광명을 밝혀주는 태양처럼, 그대, 내게 말해주오, 내 사랑은 오직 당신뿐이라고...... 비온 뒤 맑게 개인 하늘이 이보다 청명할까- 아침 햇살속에 지저귀는 종달새가 이보다 더 산뜻할까... 지금이라도 당장 곁에 있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싶은 충동이 느껴 질 정도로 아름답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노래는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누군가 눈물을 터트렸다.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여인은 물론이고 남자들까지 눈물을 글썽였다. 분명 아름다운 노래이고, 사랑을 찬미하는 노래것만 어찌해서 가슴이 저며 오는 걸까? 마치 이 세상 마지막 사랑의 노래처럼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멈추라 하는 사람은 없다. 행여 조금만 소리라도 새어나가면 노래가 멈춰질새라 동그란 눈에서 흘러 나오는 눈물을 소리없이 훔칠 뿐이다. 아마도 죽는날까지 이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는 다시 들을 수 없으리라. 그야말로 천상의, 축복받은 목소리였다. 혼신의 힘을 다하는 가인의 목소리속에 푹 빠져버린 사람들은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몰랐다. 감히 음ㅋ시인 주제에 손을 뻗으면 바로 맞닿을 곳 까지 황제에게 접근했 다는 것이 얼마나 무엄한 행동인지-! 그저 그가 주는 최음제에 잔뜩 빠져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별안간 음유시인을 껴안는게 아닌가?! 곁에 총애해 마지않는 미란다가 있고, 그의 발아래에는 끊임없이 애무하는 크세르의 요녀가 있는데 남자를, 그것도 노래하고 있는 미천한 음유시인을 껴안을 이유가 없을터. 이상하다고 생각할 무렵, 갑자기 황제의 발 아래에 서 애무를 하고 있던 요녀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그와 함께 음유시인의 몸을 덮고 있던 하얀 망토가 펄럭이며 계단아래로 떨어졌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놀라서 일제히 벌떡 일어섰다. "화...황제폐하!!!!!!!!!!" 그것은 천지가 개벽할 일생일대의 대 사건이었다. 또한 시/작/이었다. ------황제 암살 사건!----------- 망토가 아래로 떨어지며 칼을 쥔 음유시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황제의 굵은 팔뚝이 그의 하얀 팔을 꽉 잡고 서로 힘을 겨루고 있었는데 그들을 둘러싼 검붉은 살기가 얼마만큼의 증오를 내포하고 있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잡아라! 놈을 잡아!!!!!" 쾌락의 파도와도 같았던 연회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벌거벗은 남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황제가 계신 단상으로 뛰어 들어갔다. 감히-, 감히 황제폐하를 음유시인 나부랑이가! 6. 가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의 한계까지 끌어내며 극상의 노래를 불 렀다.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눈물이 나올 만큼 심연의 깊은곳에 있는 모 든 감정을 담았다. 다시는 이와 같은 노래를 부르지 못하리라... 그리고 모두가 노래에 심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무렵, 오랫동안 준비되 어 온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장식할 최후가 다가왔다.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마치 연출인양 자연스럽게 황제에게 다가갔다. 정말로 사랑하는 연인처럼 달콤함을 담은 목소리로 노래하며 천천히.. 아 주 천천히 감히 우러러 볼 수 조차 없는 위대한 황제에게 접근한다. 드디어 어느정도의 거리가 되었을 때, 가인은 그토록이나 소중히 품에 간 직하고 있던 하프의 한쪽 끝부분을 쥐었다. 그리고 마음의 염원을 담아 힘차게 내질렀다. "-----!?" 황제의 검은 피부가 움직였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눈앞에 다가왔다. 짙은 사향냄새가 현기증이 일 만큼 강렬하게 코속을 휘감으며 거대한 인 간의 몸이 그를 덥쳤다. 까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 술렁임. 팔이 붙잡히고 망토가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실패라는 두글자가 빠르게 머리속을 지나갔다. 가인의 일그러진 은회색 눈동자속에 검은피부와 검은눈동자의 젊은 남자 가 웃고 있다. "우린 구면이지?" 그가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가인은 그제야 그의 목소리가 어째서 낯이 익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엊그제 주점에서 자신을 구해준 바로 그 남자였다! "1년전, 크세르의 잔당들을 모조리 처치했지만 그들의 수괴는 놓치고 말 았다. 나는 분명 기회를 주었어. 그것을 놓아버린 것은 너다." 황제의 득의만만한 목소리속에 가인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알고... 있었다?! 오직 이 날만을 살아온 가인에게 그것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그는 이미, 자신을 처음 만났을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단 하나의 우연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꼬여버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가인은 사생결단을 낼 다짐으로 칼을 쥐고 있는 손에 온 힘을 보냈다. 하지만 그보다 몸집이 더 큰 황제에게 양 팔이 잡혀 있는 지금, 힘으로 이 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인의 하얀 팔뚝에 힘줄이 불거지며 바르르 떨렸다. 멈출 수 없다! ----10년! 쥐새끼처럼 어둠속에서 도망만다니던 세월이 10년이었다! 그 긴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을 보아왔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초개처럼 목숨을 버렸던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데! 사로잡혀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는 일념으로 하프손잡이 속 에 감춰놓은 칼을 꺼내든 것은 오직 한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죽을 수 없다. 아직은 아니다. 너, 사마르칸다의 황제- 그대와 함께가 아니라면 죽어서는 안된다! 단, 한번. 평생에 두고 단 한번의 기회다. 여신이여, 보우해주소서! 가인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리고 뒤로 한발 물러서며 몸속에 남아있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황제에 게 잡혀 있던 팔을 확 빼냈다. 동시에 칼을 곧추세우며 돌진했다. "죽어라- 야만인!" "안돼요-----------!" 미란다의 경악에 찬 비명소리와 함께 가인의 머리카락들이 허공속에 흩날 렸다. 하얀 뭉치가 툭 소리를 내며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가인은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어졌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황제를 향해 팔을 휘둘 렀다. 하지만 칼은 온데간데없고, 붉은 핏방울만이 황제의 얼굴에 뿌려졌 을 뿐이다. "폐하! " 순식간에 시종들이 달려와 황제의 용안을 어지럽힌 핏방울을 닦아내느라 난리다. 누군가의 손이 잘려져버린것보다 황제의 얼굴에 피가 튄 것이 세상천지가 뒤바뀐양 허겁지겁이다. 덕분에 황제의 용안은 다시 단정하게 돌아왔다. 하지만 손이 잘려버린 가인은 테렉산의 검에 목이 겨눠진 채 움직이지 못 했다. 검붉은 피가 사라져버린 손에서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심연의 깊이가 느껴지던 은회색의 눈동자속에 절망이 어린다. 그러나 테렉산의 얼굴에는 한치의 감정조차 없이 무표정할 뿐이다. 절망속에서도 가인은 그가 주점안에서 자신을 구해준 남자라는 것을 기억 해냈다. 지독히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얼굴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또한 온통 벌거벗고 있는 난잡함 속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제대로 옷을 갖춰입고 있었다. 황실근위대의 검은제복이 그의 금욕적인 얼굴과 잘 어울렸다. "너-.......너는?" 가인의 얼굴을 바라본 헷소르재상이 충격으로 굳어버린 얼굴로 겨우 입을 열었다. 경악으로 치뜬 눈과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당장에라도 숨이 넘 어갈 것 처럼 급박하다. "왕자-----?" 헷소르 재상의 외침과 함께 다른 이의 목소리도 동시에 나왔다. "피의 인장! " 곧이어 이곳저곳에서 경악의 외침이 이어진다. "크세르의 왕자-?!" "오오-, 이럴 수가 저것이 아직도 남아있었단 말이냐?!!!!" "말도 안돼!!! 저것을 멸종시킨 지가 언젠데!!!!" 경악으로 부릅떠진 사마르칸다인들의 눈속에 선명한 붉은 보석이 가인의 이마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테렉산의 검이 칼을 쥔 가인의 손을 베어버린과 동시에 이마의 띠가 검 끝에 의해 잘려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선연하게 드러나 버린 붉은 보석은 모두를 충격에 휩싸이게 하 기 충분했다. 이것은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증거. 인류의 단 하나, 크세르의 왕족에게서만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기 때 문이다. 황제조차도 생전 처음보는 것이었다. 암살자를 앞에 둔 상황임에도 황제는 놀란 얼굴을 하고 가인을 바라보았 다. 크세르의 왕족들은 이마에 붉은 보석을 갖고 있다고 하더니 믿지 못 할 사실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인간의 이마에 보석이 박혀 있다니? 게 다가 저토록 신비하고 고아한 빛깔은 처음이다. 세상 어떤 진귀한 보석이 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한가롭게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느새 흉흉한 살기로 뒤덮어버린 연회장은 당장에라도 가인의 육체를 찢 어죽이고도 남을 것 같다. "감히 크세르인 주제에 황제를 시해하려 하다니! 당장에 작두형에 처해 목을 잘라버리시옵소서!" "아직도 남아있는 이교도들에게 본보기로 광장에 목을 효수하시옵소서!" "세상에, 크세르의 왕자라니! 살려둬선 아니됩니다!!!!!" 죽음이 가인의 발아래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크세르왕자!" "이교도!" "죽여라! " "죽여라!!!" "죽여라---!" "그만! 모두 진정..................................억?!" 소란스러워지는 장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던 황제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옆구리에서 날카로운 아픔이 느껴졌다. 익숙한 화장냄음과 함께 황제의 얼굴에는 고통보다 경악이 앞섰다. 왜냐하면 그의 옆구리에 처음보았을때부터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투명 한 초록 눈망울이 물기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란다?" 황제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작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비녀로 틀어올려졌던 머리가 산발이 되어 허리아래까지 흐트 러져 있어 더욱 청순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비장했다. "폐하.... 저분을 살려주세요. 그렇지 않을시엔 당신을............. 죽/이/겠/습니다." "미란다!" "황제폐하!" "저 요녀!!!!!!!!!" 미란다의 머리를 장식했던 비녀의 뾰족한 끝이 정확히 황제의 옆구리에 반쯤 박혀 있었던 것이다! 황제의 존귀한 옥체에 붉은 피가 선을 그리며 발 아래로 뚝뚝 떨어진다. 테렉산이 움직이려하자 미란다의 날카로운 눈매가 그리로 향했다. "움직이지마, 테렉산!" 평소의 여리고 작기만 하던 음성이 아니다. 날카로운 명령형이다. 그 기세에 테렉산의 발이 바닥에 붙박히듯 굳어버린다. 그러나 이내 미란다의 눈동자가 쓸쓸하게 흐려진다. "부탁.......이야.. 테렉산." 테렉산은 아무말 없이 미란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떠한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슨........짓이냐.........미란다 네가 왜?" 옆구리의 찔린 상처보다도 더 한 고통으로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배신당한 자만이 나타낼 수 있는 고통이다. 그러나 담담한 표정이 된 미란다는 비녀를 꼭 쥐고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분홍빛 입술이 꿈을 꾸는 듯한 목소 리로 열렸다. "당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의....... 우리들의 왕자님. 당신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우리 모두는 감격하고 말았답니다." *******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었으며 인간다운 의복을 입을 수 있던 평화로운 일 상의 나날들......... 그때 그녀는 요녀가 아니었다. 꿈많은 12살의 작은 소녀였을 뿐이다. 귀족도 아니고, 돈많은 부자의 딸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미천한 농노의 딸이었을 망정 미래가 있었다. 그날은 여신의 경배일, 사마르칸다가 무토마라신께 대제사를 지내며 열흘 동안 축제를 여는 것과 마찬가지로 크세르에서도 여신의 부활을 경배하고 축하하는 의식이 열린다. 단, 시끌벅적한 사마르칸다에 비해 크세르이 의 식은 경건하기 그지없다. 꽃잎들이 흩날리며 하얀 의복을 입은 신관들이 거리를 행진한다. 맨 앞에 금십자를 든 대신관을 필두로 소년합창단이 맑은 목소리로 노래 를 부르며 따라간다. 그것은 다시 보지 못할 장관이었다. 거리 곳곳에 구경나온 사람들 어느 누구하나 말하는 이 없이 모두가 숨죽 여 그것을 지켜보았다. 드디어 중앙의 광장에 이르러 거대한 단상에 신관들이 모여들고, 그날의 하이라이트인 춤과 노래를 사람들에게 선사한다. 금발의 무희들이 하늘거리는 비단옷을 입고 태양까지 닿을 듯이 춤을 추 었다. 사람들은 환호성과 박수로 그들을 찬미했다. 행사의 마지막으로 합창단원 중 한 소년이 무대로 나와 '세메툴리아의 노 래'를 불렀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더욱 하얗게 반짝이는 소년의 이마에는 경외해마지않는 피의 인장이 박혀 있다. 멀리 있는 미란다의 눈에도 확실하게 보일 만큼 뚜렷한 것이었다. '저분이 왕자님이시란다' '우리들의 세 번째 왕자님이시지' '신관이 되실지도 모른대. 저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신 분이라면 대신관도 될 수 잇을지 몰라' ....왕자님..........우리들의 왕자님....... 세메툴리아의 노래를 듣고 여신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지금 당장 여신께서 인간세계에 현신하실 것만 같았다. 마치 연출처럼 비둘기떼가 푸른 창공을 향해 푸드득 날아오르며 꿈결같은 노래는 끝났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왕자의 이름을 연호하는 속에 어린 미란다와 그녀의 가족들도 있었다. 그것은 아직 그녀들이 '인간'으로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우리들의 왕자님, 부디 살아남아주세요. 살아남아 세메툴리아의 노래를 지켜주세요. 그 황금찬란했던 나날이 잊혀 지지 않을 수 있게" ".............." 가인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떠오른다. 작은 여인 미란다. 황제를 사로잡은 요녀로서 그녀의 미래는 어느정도 보장되어 있었다. 비록 크세르인이라는 핸디캡이 있지만 황제의 비호아래 어쩌면 권력을 누 리며 후궁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한다고해서 가인이 무사히 황궁을 빠져나갈 수 있으 리란 보장은 없다. 오히려 그녀도 죽고, 가인도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버렸다. 연인을 배신하고 왕자님과 함께 죽기를 택했다 그것은 크세르의 눈이었다. 살육의 밤, 비밀통로에 자신을 밀어넣던 대신들의 눈동자가 그러했고, 사 마르칸다의 무자비한 칼 아래에서 대신 죽어간 동료들의 눈동자가 그러했 다. 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누군가의 죽음위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못견디게 만들었다. 더구나 그게 자신보다 훨씬 자그마한 여인임에야. 황제의 얼굴이 점점더 고통으로 흐려진다. "요녀! 당장 황제폐하를 놓아라!" "사지를 찢겨 죽이기 전어 어서!" 대신들의 협밥속에서도 미란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녀를 쥔 손에 더 욱 힘을 줄 뿐이다. 대신 테렉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분을 놓아주세요. 그렇지 않을시엔 이분을.....................죽일 겁니다." "미...........란.....다...." 황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인데.....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미란다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저까짓 망국의 왕자 따위를 위해 나와 자신마저 죽이겠다는 건가? 주르는 허탈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50캐럿짜리 다이아몬드나 에메랄드, 각국의 진귀한 귀물들이 저따위 초라 한 왕자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목숨보다도 더 소중 한것이 겨우 저따위 것이라니.............. 옆구리에 파고드는 비녀보다도 미란다의 비정함이 더욱 아프다. 하지만 생은 예상의 범주를 넘는 것. 운명은 잔혹한 칼날을 휘두르며 절대 호락호락 넘어가주지 않는다. 무기가 되어버린 비녀를 황제의 옆구리에 찔러넣은 미란다는 당장에라도 끝까지 찔러넣을 기세로 좌중을 위협하고 있지만, 그녀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인질이 황제라는점.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생각보다 크다. 소리없이 미란다의 뒤에서 움직인 그림자를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단지 전사의 예리한 눈을 가진 테렉산이 눈치챘지만 그가 알았을때는 이 미 그림자의 날카로운 금사(金絲)가 미란다의 가는 목에 휘감긴 뒤였다. 그리고 그녀의 목이 육체와 분리되어 허공속에 뿌려진 것은 순간이었다. 깨끗한 단면으로 잘려나간 머리에선 피조차 나오지 않았다. "미란다---------!" 황제가 절망에 찬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여자들의 비명속에 미란다의 황금머리카락들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황 홀하게 물결치는 황금의 군무................... 마치 생시처럼 떠진 그녀의 눈동자속에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던 표정없는 사내가 떠올라 있다. ---부탁해, 테렉산.... 부디, 부디 테렉산.................... "미란다! 미란다아아아!!!!" 황제는 옆구리에 꽂혀 있는 미란다의 비녀를 빼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 닥으로 추락하는 그녀의 육체를 껴안았다.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 같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경악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미... 미란다? 미란다-. 미란다! 아아-, 미란다----! 머리가 어디있느냐! 미란다의 머리! 미란다의 머리!!!!!!!!!!!!!!!" 그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화...황제폐하, 어서 치료를 하셔야 합니다!!!" "머리를 찾아오라! 오오 내 사랑! 어서 머리를 찾아와-----------" 헷소르재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욱 미친 듯이 소리질렀다. "할 수 없군, 머리를 가져오게!" 결국 헷소르 재상이 시종에게 명했다. 그러자 파랗게 질린 시종이 미란다 의 머리가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미란다----------, 미란다-------" 황제는 더욱 정신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 간악한 암살자를 처단하지 않고!" 흥분으로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 재상이 테렉산에게 명했다. "죽여라, 다시는 이땅에 더러운 크세르의 발끝하나 닿지 못하게 하라!" 가인을 향해 뻗어있는 테렉산의 검끝이 파란 빛을 발한다. 이 아수라장속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은 테렉산의 검이 천천히 위로 치 켜졌다. 가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테렉산을 노려보았다. "왕자님, 도망가세요!!" 미란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며 파랗게 질려 있던 크세르 여자가 가 인에게 외쳤다. 그와 함께 그녀의 벌거벗은 육체가 테렉산을 향해 달려들 었다. 무기따위 없는 그냥 맨몸의 돌진이었다. 그러나 길게 자란 손톱과 광기어린 눈동자가 마냥 연약하기만한 여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림자가 황급히 황제의 앞을 가로막으며 방어자세를 취 했다. 그러자 가인에게 향해졌던 테렉산의 검이 여인을 향해 움직였다. 싱거우리만치 쉽게 '푹' 소리를 내며 그녀의 미끈한 배에 검이 깊숙히 박 힌다. "세렐!" 헷소르 재상 옆에서 교태를 부리던 여인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세렐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배에 깊숙히 박힌 칼날을 맨손으로 꽉 잡는다. 그녀의 결연한 눈동자속에는 사지가 절단될 지언정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도망..........가세요............ 왕..자님.............. 어서-------------------" 죽음에 다다른 목소리가 염원을 담아 강하게 흘러나왔다. --와장창! 그때였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들의 외침과 남자들의 비명이 연이어 터 져나왔다. "도망가세요, 왕자님!" "으아아악!" "뭐..뭐냐, 이것들이 미쳤어!!!!" 그것은 피의 전조. 미친 살육의 광무. 우리들의 왕자님! 세메툴리아의 또다른 기적이시여- 부디 살아남으소서. 살아남으소서. 오직 하나의 바램이 만들어낸 피의 살육제였다. 7. 벌거벗어 아무런 무기조차 지니지 못한 그녀들은 그저 천박한 창녀일 뿐 이었다. 자신의 몸에 어떤 짓이 가해지든 기계적인 쾌락에 떨고 주인이 만족할만한 신음을 흘릴 뿐이다. 벌려진 다리 사이로 어떤 물건이 들어와 도 상관없다. 그녀들은 그냥 물건이었으며 무얼해도 상관없는 가축이었 다. 그런 그녀들이 손톱을 세웠다.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비녀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비계덩어리로 뒤덮인 사마르칸다 사내의 등에 꽂혔다. 누가 먼저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째서 동시다발적으로 그런일이 벌어져야 했는지 이유조차 없다. 다만 여태까지 교태와 유혹으로 얼룩졌던 그녀들의 초록눈동자가 고통과 광기로 얼룩져 있었다. 크세르가 멸망당하고 10년, 그 세월동안 철저히 짐승으로 살았다. 무슨짓 이 벌어지건 웃기만 했다. 이미 고통이나 쾌락과는 상관없는 그저 웃을 뿐인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 피빛 찬란한 보석이 나타났다. 왕자- 그것은 그들이 잊고 있었던 과거의 시간이었다. 이미 없다고 생각한 그들 의 상징이었다. 얼마나 많이 원망하고, 저주하며 증오했던가------- 왜 지켜주지 못했나.. 왜 우리를 그들의 발 아래 짐승이 되게 만들었는가! 그만큼의 증오와 고통속에서 그리움은 독처럼 퍼져나갔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고, 피가 뿌려졌다. 발 아래 아무렇지 않게 짓밟았던 짐승들이 제 주인을 물기 시작한 것이다. 비녀가 없는 여자들은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로 주인의 살을 긁었다. 아양을 떨기 위해 길러진 손톱이 날카로운 무기가 되고, 남자의 음경을 애 무하던 이빨은 송곳이 되어 파고든다. "으아아악, 살려줘-----!" 피, 피, 피! 비명, 비명, 비명. 그러나 오직 하나. 한가지 목소리만이 가인의 두 귀에 똑똑히 들어왔다. -왕자님! 살아남아주세요! 그리움이 집단광기로 변태하여 그들을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미쳤어!! 이것들이 미쳤어!!!!!!!!!!!!!!!" "경비들을 불러와! 어서!" "우아아아아아-------------!" 아까까지만해도 여자의 가슴을 빨고 있던 중년의 늙은이가 그녀에게 가슴 을 뜯긴 채 비명을 질렀다. 축 늘어진 가슴에서 피가 철철철 끓는다. "이 쌍년들, 죽어라 개년들아!!" 욕지기를 퍼부으며 젊은 귀족이 자신에게 덤벼드는 여자의 머리를 탁자위 로 집어던졌다. 그녀는 종잇장처럼 부딪히며 피를 쏟고 만다. 음식을 담아두었던 접시들이 깨지고, 온갖 보석들이 날아다녔다. 여자가 깨진 접시의 잔해를 들고 남자의 음경을 찔렀다. 남자의 찢어질 것 같은 비명이 전체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승리의 쾌감은 잠시뿐, 누군 가에게 뒷머리채를 잡힌 여자는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머리가 깨져버렸다. 이어 그녀의 머리통보다 큰 커다란 발바닥이 여린몸을 짖밟기 시작했다. 여자는 비명을 질렀지만 결코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직 한가지만을 외칠 뿐이다. "왕자님! 어서 도망가세요!!!" "왕자님! 살아남으세요!" "세메툴리아의 기적을......." "왕자님! 우리들의 왕자님!" 왕자- 왕자- 왕자- "죽어라, 개년들!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싹 쓸어버려------!" 아무리 비무장의 벌거벗은 나체라해도 사마르칸다의 남성들은 크세르 여 자들보다 두배는 크다. 갑작스런 기습으로 혼비백산하여 당했지만 제대로 사태를 파악한 남자들 은 막강한 완력으로 덤벼드는 여자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며 아름답던 모습들이 일그러졌지만 상관하지 않았 다. 오직 하나, 감히 자신들에게 기어오른 반역에 대한 처단만이 있을 뿐 이다. "다 죽여라--------, 나의 미란다를 해한 것들-----! 다 죽여버려---------!!!" 그림자의 수호를 받으며 황제가 미친 듯이 외쳤다. 그는 품에 안은 미란다의 시신으로 인해 온통 피투성이였다. 어느새 경비들이 쏟아져들어오기 시작했다. "까아아악!" "아아아아악!" 경비들의 예리한 검날아래 그녀들은 조각조각으로 잘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기에 찬 그녀들의 눈빛은 사그라들지 않고 더욱 불타올랐다. 칼에 손이 잘리고 다리가 잘려도 이미 증오와 광기로 물들어버린 그녀들 은 숨이 끊어질때까지 덤비고 또 덤볐다. 테렉산에게서 도망친 가인은 경비에게서 빼앗은 검을 휘두르며 아비규환 의 정중앙에 있었다. 그는 몸에 익힌 검술과 격투술을 총 동원하여 크세르여자를 짓밟고 있는 중년인을 베어버렸다. 여자들에 비해 두배나 큰 사마르칸다인은 내장을 쏟으며 뒤로 넘어가버렸다. 이어 뒤에서 공격해온 청년을 발차기로 쓰러 트렸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심장을 찔렀다. 손이 잘려버려 출혈이 크지 않았다면 좀더 활발하게 싸울 수 있었을 것이 다. 허나 아픔따윈 느껴지지도 않는다. 죽음마저 초월해버린 광기속에서 이따위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망.......가세요......... 우리들은 상관마시고........" 가인이 도와준 여자가 으깨진 머리를 하고 겨우 말을 잇는다. 이미 한쪽 눈알이 반쯤 밖으로 빠져나온 그녀의 얼굴은 과거에는 아름다 웠겠으나 기괴하기 짝이 없다. "상관없다! 나는.." 가인은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이들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살아남으세요. 살아남아.......부디......." 그러나 여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인의 등뒤로 쳐들어온 경비를 발견한 그녀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아이 었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스스로 방패가 되어 가인을 감싸안았다. "어억!" 그녀의 등에 검이 꽂혔다. "부디..............왕자님.............." 놀라서 서 있는 가인에게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무너졌다. "왕자님! 어서 가세요!" 또다시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 쓴 여인은 말을 마치자 마자 머리에서 항 아리가 박살나며 쓰러져 버렸다. 조각조각 흩어진 파편들은 또다른 여자들의 무기가 되어주었지만 경비들 의 중무장속에 미약한 반항일 뿐이다. "도망가세요! 어서 도망가세요!" 마치 한목소리처럼 그녀들은 외쳤다. 가인은 생각했다. 그들은 짐승이 아니었다. 개도 아니고, 요녀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사/람/이었다. 인간이었다! 찬란한 황금머릿결과 아름다운 초록눈동자를 가진........그저 내 누이.........내 어머니............................ 나의.......... 백성..! -살아남으십시오, 왕자님. 비밀통로로 자신을 밀어넣어준 대신들과. -살아주세요, 왕자님! 결사적으로 자신을 위해 죽은 동료들........그리고...... -살아남으세요, 왕자님! 그녀들. 왕자, 왕자, 왕자, 왕자, 왕자! 대체 왕자가 무엇인데------------------------------ "으아아아-!" 가인은 괴성을 지르며 검을 힘껏 휘둘렀다. 그의 검을 맞은 경비가 붉은 피를 뿌리며 쓰러진다. 나는 왕자가 아니다. 이따위 힘없는 왕자가 무슨 왕자란 말이냐- 어차피 벌거벗은 몸은 다른 인간들이나 틀릴게 없다. 그는 누이들의 시체를 밟고서서 적의 피를 뿌렸다. 어느새 그녀들은 굳어버린 살덩이가 되어 바닥에 뒤덮혀 있었다. 반항하고 있는 것은 오직 그 뿐이다. 하지만 멈출수 없다. 나는 그냥 인간이란 말이다. 너희가 그리 죽어야 할 가치는 없어--------- 왜 너희가 내 대신 죽는단 말이냐- 왜 나보고 살아남으라 하는 것이냐- "아아아아-----------------" 검을 다시 크게 휘둘렀다. 빠각, 뼈 베이는 소리와 함께 병사의 목이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이미 모든 힘이 소진된 상태다. 이제 죽음만이 남아있는 전부일 것이다. -살아남으세요- -살아남으세요- 너희를 죽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내가 죽기 위해 이곳에 왔다. 사마르칸다 황제의 목과 함께. 왜 너희가 죽은 것이냐? 너희는 그저 여자들일 뿐인데.... 그저.. 요녀들일 뿐이었는데!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있다. 너희들의 바램으로, 아직은 살아있지만 그러나 곧 죽는다. 저 무도한 야만인의 칼 아래 너희의 마지막 왕자가 죽을 것이다. 그것은 개죽음일테지. 이 목숨 잇기 위해 대체 몇이나 죽었는데 겨우 여 기서 죽어야 한단 말이냐-! 이 마지막을 위해 너희가 희생되어 왔단 말인가- 아니, 그럴 수는 없지. 결코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헉.....헉....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피무덤이 되어 버린 연회장에 경비들이 원을 형성하며 그와 대치중이다. 그러나 악에 받친 그의 저항으로 인해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잘려진 손목에서는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하얗던 얼굴이 더욱 창백 하였으나 부릅떠진 눈동자속에는 아직도 결연한 의지가 남아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경비들 너머 여전히 미란다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온통 피투성이가 된 가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 다. 그래, 한가지.. 아직 남아있는 것이 있다. ------여신이여! 축복을 내려주소서- 저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흐..........흐흐흐..............." 가인의 자주색 입술에서 흐느낌과도 같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경비들은 더욱 긴장한 얼굴로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내 백성들... 내 불쌍한 누이들을 위해 부디 축복을 내려주시옵서! 그대의 축복된 약속에 따라 나를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저자가 나를! 나를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명심하라. 네가 원하는 순간, 그 사람은 널 사랑하게 될 것이고 평생 그러하게 되리라. 이것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나의 힘..... "하하하하하하------"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속에서 갑자기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단단하게 곧추세우고 있던 검조차도 아래로 늘어뜨리고 무방비 한 모습으로 마구 광소한다. 피투성이의 모습과 함께 그것은 실로 기괴하 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황제가 얼굴을 번쩍 들었다. 금방까지만해도 미란다의 목없는 시체를 붙들고 울고 있던 그였것만 파란 광채를 발하는 눈동자가 매섭게 번뜩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장 단상아래 경비들에 포위당한채 미친 듯이 웃고 있는 가인에게로 향해졌다. 황제와 가인의 눈이 마주쳤다. -나를 사랑하라! 내 기꺼이 너의 유일한 반려자가 되리라! "아핫핫, 하하하---------------" -나는 여기서 죽을 것이니..... "아하하하하하하-----!" -그로써 사마르칸다의 정통후계를 끊어놓으리라. 또한, 너 황제의 이름은 영원히 치욕으로 기록되리라. 크핫핫핫핫! "황제폐하?!"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고 생각한 순간 화살처럼 그의 몸이 튕겨올라갔 다. 그 때문에 미란다의 시신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대신 그의 곁에 호휘하고 서 있는 경비대장의 허리에서 긴 장검 을 뺏어들더니 곧장 아래로 뛰어가는 것이다. 시종들과 대신들이 깜짝 놀라 만류하려 했지만 이미 황제는 다친 사람치 고 너무나도 빠르게 달려갔다. 황제는 미친 듯이 경비들의 포위망을 헤치며 가인에게 접근했다. 경비들은 감히 황제의 옥체에 손을 댈 수 없기에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 었다. 황제- 주르는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모든 증오를 담아 가인을 향해 휘둘렀 다. ----퍽! 검이 무방비하게 서 있는 가인의 어깨를 꿰뚫며 피가 주르의 얼굴에까지 튀었다. 그러자 가인의 손에 한몸처럼 붙어있던 검이 챙강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르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 다. 그 여세에 가인은 어깨를 관통당한 채 뒷걸음치며 뒤로 달려야 했다. 시체가 발에 걸려 넘어질뻔 했지만 어깨에 박힌 검날에 균형이 유지되며 끝내 벽에 부딪치고 만다. "으윽........." 등이 벽에 심하게 부딪치자 가인의 입에서 고통스런 신음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주르는 전혀 봐주고 싶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무지막지한 손으로 가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은회색의 눈과 증오로 이글거리는 검은눈동자가 마주쳤다. 검붉은 살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타올랐다. 그것은 누구도 감히 접근 할 수 없는 피의 장막과도 같았다. 이윽고 황제가 먼저 짖씹어삼킬 것 같은 증오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게, 무슨 저주를 걸었느냐?" "................." 그러나 가인은 피를 뚝뚝 흘리며 황제의 살기젖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 다. 입술에는 미소마저 어려있었다. 마치 가소로운 짐승을 비웃는것만 같았다. "말해라, 내게 무슨 저주를 걸었느냐-----------!" 쩌렁하고 황제의 목소리가 실내 곳곳에까지 울려퍼졌다. 그러자 모든이들의 어깨가 움찔 놀라며 경악의 표정이 떠오른다. 저주? 저주라니! 황제에게!!!! "말해라, 이교도의 저주받을 왕자야. 이 손 끝에 맺힌 하얀 것이 대체 무엇이냐? 어째서 네놈의 손과 연결되 어 있는 것이냐? 네까짓놈이 감히.................감히 내게 저주를 걸어? 말해라, 사지를 조각조각으로 분리하여 네 동족의 먹이로 던져주기 전에." "흣..........흐흐흣........." 당장에라도 쳐죽일 것만 같은 황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눈썹을 일그리며 웃었다. "말해라, 이 더러운 고깃덩어리야!!" "하하하하........." "웃지마라! 웃지마! 웃지마!" "아하하하----------" "말해, 내게 무슨 저주를 걸었느냐! 말해라! 말해라!!!!" "아하하하하하---------" "으아악, 미친새끼!" 분을 이기지 못한 황제가 가인의 멱살을 그대로 바닥으로 내리꽂았다. 그러자 가인의 육체가 인형처럼 쓰러지고 만다. 황제는 그의 어깨에 박혀 있는 검을 사정없이 뽑아버렸다. "우욱!" 신음과 함께 피가 분수가 되어 뿜어져 나왔다. "죽이지 마라. 절대로 죽여선 안돼. 죽음보다 못한 삶이 무엇인지 똑똑히 깨닫게 해주리 라. 너의 내장을 네 손으로 네 입에 쳐넣게 하리라. 네 동족의 육신을 삶은 바비큐로 만들어 너의 항문에 쑤셔넣을 것이다. 눈깔을 파내고 입술을 잡아 뜯을 것이며, 밤낮 할 것 없는 채찍질에 소금 물을 뿌릴 것이다! 알겠느냐? 차라리 죽게 해달라 빌고 싶게 만들겠다!! 하슈멜!" 황제의 명에 경비대장 하슈멜이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지하감옥에 던져넣어라! 그러나 명심해라. 죽여서는 안된다. 절대로-, 절대로 죽게해선 안돼!"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황제의 명에 따라 하슈멜이 경비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두명이 달려와 쓰 러져 있는 가인의 몸을 일으켰다. 흐릿해진 시야와 더욱 창백해진 얼굴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경비들에 의해 질질 끌려가면서도 입가에 머물러 있는 미소는 사 라지지 않았다. 그가 끌려가는 발 아래에는 핏줄기가 길죽한 길을 형성한다. 8. 헉...헉...헉.......... 한치앞도 볼 수 없는 어둠속을 마냥 달렸다. 끝도 없는 어둠은 마치 영원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달리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 들이 너무나도 오싹했기 때문이다. -살아주세요, 왕자님! -왕자님! -왕자님!! --------으아아아아!! "자, 잡아! 움직이지 않게 꽉 잡아야 한다!" "출혈이 너무 큽니다!" "젠장, 죽게해선 안된다. 무슨일이 있더라도 살려놔야해!"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 반지에 명명된 약속에 따라 축복을........ -1000년을 이어온 내 나라가 불타고 있습니다! 크세르의 역사와 문화를 짖밟고 있는 저들에게 지금 당장 철퇴를 가할 수 없다면 대체 무슨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살아주세요, 왕자님! -세메툴리아의 기적을! 기적을! 내 백성들, 내 불쌍한 누이들을 위해 부디 축복을 내려주시옵서! 그대의 축복된 약속에 따라 나를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저자가 나를! 나를 사랑하게 하시옵소서------------! 파앗! 끝이 없을 것 같은 어둠속에서 빛무리가 환하게 퍼져나갔다. 그것은 소년의 작은 몸을 감싸안으며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축복을 받으라, 나의 아들. 성스러운 여신의 축복을.... ******* 황제가 저주에 걸렸다! 조그만 속삭임들이 커다란 눈두덩이가 되어 사마르칸다의 전역으로 퍼져 버린 것은 그야말로 삽시간의 일이었다. 황궁에서 크세르 요녀들의 시신이 밤새도록 운반되어 요크나산에서 불태 워졌다는 것 또한 이미 비밀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차고 넘치는 가장 화려한 대제사의 축제였지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문은 암울한 기운을 동반한채 모든것을 차갑게 가라앉고 말았다. "똑바로 말하라! 대체 무엇이냐?!" 황제의 노한 음성이 쩌렁 울리자 땅바닥에 거의 눌러붙다시피한 주술사들 이 더욱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흰천으로 감아놓은 옆구리에서 피가 터져 빨갛게 물들임에도 주르피오황제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벌레처럼 떨기만하는 주술사들을 성난 눈빛으로 노 려보았다. "이 손 끝에 맺힌 하얀 것이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더냐?!!!!!" 분노를 삯힐 수 없는 황제가 더욱 큰 소리로 버럭 화를 냈다. 그러자 한쪽에 가만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대신관이 입을 연다. "폐하, 폐하께서는 무토마라신의 축복을 받으시어 어떤 저주에도 통용되 지 않는 은혜의 문신을 지니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토마라신의 권능은 의심할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의 침착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눈동자속에 불길이 치민다. "은혜의 문신?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르피오황제가 사납게 눈썹을 치뜨며 손가락을 대신관을 향해 쭉 뻗었다. 그러나 대신관의 눈엔 그저 손가락으로 보일 뿐이다. "그대의 눈에도 이 손가락에 맺혀있는 하얀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냐? 그런자가 무토마라신의 제1사제라 칭할 수 있단 말이냐?!" 대신관은 입을 다물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손가락에 맺힌 하얀 것, 그것은 오직 황제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 주술사들도, 신성력을 지닌 자신에게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저주일까? 아니, 아니다. 무토마라신의 은혜의 문신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다. 실제로 선대황제였던 하이넨샤황제는 몇번이나 저주에 의한 암살이 시도 되었으나 은혜의 문신으로 인해 모두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저주도 황제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대체 어떤 저주가 신을 능가할 수 있단 말이냐- 하지만. "모.......모르겠나이다, 소인들에게는 하얀실은 커녕 어떤 것도 보이지 않 사오니............. 부디 죽여주시옵소서!!!!" 대신관에게 향해졌던 황제의 사나운 눈빛이 주술사들에게로 향하자 그들 은 더욱 부들부들 떨어대며 그저 죽여주십시오만 연발한다. "외람되오나 폐하 저주...를 받으신 연후에 옥체에 어떤 변화라도 있으셨 나이까?" 창백한 얼굴의 헷소르재상이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이번 사건에 가장 크게 연루된 헷소르니 만큼 그가 느끼는 불안은 상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재상의 몸으로 도망갈 수는 없는 법, 지금 이 자리에서 황제의 칼에 죽는다해도 그는 자신의 직분을 지켜야 했다. 주르피오황제는 더욱 늙어버린 헷소르재상을 바라보며 조금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크세르의 왕자들은 저주도 다룰 줄 아는가?" "그러한 말은 들은 적이 없사옵니다." "그대가 그자를 궁으로 불러들였지." ".....내력조차 알아보지 않고 한순간의 재능만으로 황궁으로 안내하여 지 엄하신 황제폐하께 심대한 누를 끼친 점, 죽어마땅하나이다. 부디 죽여주시옵소서-" 헷소르는 절망적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외인을 황궁으로 불러들이다니... 아무리 재상이라 지만 목이 달아날 일이다. "그대에 대한 처벌은 원로회의에서 결정될 것이오. 그때까지 근신하라." 그러나 헷소르는 하이넨샤황제때부터 충성을 바쳐온 신하였으며 황제의 가장 큰 우호세력이기도 했다. 지금 그를 축출한다는 것은 자신의 오른팔 을 베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직 이성이 남아있던 황제는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할 수 있었다. 그래, 아직은...... 아직 그는 광황제(狂皇帝)가 아니었다. 하루새 10년이나 더 늙어버린 헷소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의 귀로 심장이 뛰고 있는 소리를 느끼고 있다. 두근.........두근...........두근.................. 9. 목이 마르다. 그리고 아프다. 어깨 한쪽이 불에 타는 것 처럼 아프다. 아니, 어깨만이 아니다. 이미 사라져버린 손목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고통을 호소한다. "치료는 끝났느냐?" "예? 아..... 이것만 먹이면 됩니다" "그게 무엇이냐?" "네필의 뿌리를 달인 것으로 진통효과가 있습니다." "곧 살점이 뭉그러질 녀석에게 진통은 무슨! 그냥 붕대나 대충 감아놓고 끝내라" ".........네......." 조그만 중년 의약사는 고문장 세세칼의 흉흉한 얼굴을 감히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조아려 명령대로 이행했다. "명심해라, 절대로 죽여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편히 자빠져 있게 놔둬서 도 안돼." "물론입죠. 감히 크세르개 주제에 위대하신 황제폐하의 옥체를 건드리다 니! 육포를 떠도 시원치 않을 것입니다!" 세세칼은 쭉 찢어진 눈을 더욱 흉폭하게 치뜨며 하슈멜에게 답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도 무방하다. 눈이나 팔, 다리 쯤은 잘라버려도 좋아." "그것 뿐이겠습니까? 사내도 아니게 만들어 놓겠습니다." "자네에게 맡기겠네" "네, 맡겨만 주십시오. 엄마 뱃속안의 일까지 다 까발길 정도로 유순하 게 만들어 놓을 것이니..." ******* -태고의 빛, 전지전능의 어머니시여... 대지엔 생명을, 어둠엔 광명을, 그대를 찬양하노니, 부디 여신이시여 굽어살피소서.. 이 가여운 그대의 자손에게 빛나는 영광을. 영광을....... "꺄아아악!" 갑작스런 여자의 비명소리에 놀라 하슈멜과 근위대원들이 달려갔을 때 그 들의 눈앞에 보인 것은 황제가 하녀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모습이었다. "폐......하?" "노래소리가 났다. 크세르의 노래가" 지금 당장에라도 하녀의 목을 내리칠것만 같은 흉폭한 살기를 담고 황제 가 말했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하녀가 필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닙니다. 크..크세르의 노래는 알지도 못합니다! 그...그...그저, 연가의 한가락을 흥얼거렸을 뿐입니다!" 아직 어린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물마저 뚝뚝 흘렸다. "제,제발, 황제폐하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세요" 구리빛 피부를 타고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황제는 감정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검을 내렸다. "노래하지마라, 앞으로 노래하는 자는. 베어버릴 것이다." 지독히도 건조하면서도 섬뜩한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그래. 아직은. 황제의 이성이 남아있을 때의 일이다. .........................................없다. 무엇인가가. 늘 주변에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없다. 심장은 끊임없이 뛰고 있는데, 무언가가 옆에 있어야만 한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그게 대체 뭐였는지 알 길이 없다. "말해봐라, 병명이 무엇인지" "........소,소,소인을........." "죽여달란 말이냐-------!" "히엑, 주,주,죽여주시옵소서----------------" 심장이 끊임없이 맥박한다.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당연히 뜨겁게 움직이는 심장이란 당연한터, 하지만 이렇게 귓가에까지 들려올 만큼 거세게 맥박치는 심장은 오히려 부담이다. 아니, 미칠지경이다. 그럼에도 의약사는 물론이고 주술사들까지 모른다한다. 높은 신성력을 자랑하는 대신관까지 유행어마냥 '죽여주시옵소서'를 연발 하며 고개를 조아릴 뿐이다. '저주다! 저주가 이리 만들고 있는 것이야. 그 빌어먹을 고깃덩어리가 날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저주- 저주---- 죽여버리고 말리라. 죽여버리고 말리라! "폐하" 벌벌떨어대며 죽여달라는 말만 연발하는 의약사와 주술사들을 모조리 몰 아내고 혼자 침소를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테렉산의 건조한 음성이 그를 불렀다. "테렉산" 황제는 진이 다 빠져버린 무방비한 얼굴로 테렉산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침궁은 성스러운 곳이다. 오직 황제가 허락한 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다. 그리고 허락된 자들중 테렉 산도 끼어 있었다. 그는 공식적인 황제의 수호기사이기 때문이다. "불안하십니까?" 수호기사라하지만 다정함과는 먼 자였다. 그럼에도 뜬금없이 황제에게 불안하냐고 묻는다. 저 지독히도 말없고 냉정한 남자가. 자신이 그렇게도 한심스러운 작태를 보였나싶어 황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보였던가......" "..................." "........없다......." ".........?" "뭔가 있어야 하는데................ 뭔가가 필요한 것 같은데........ 없다. 그게 뭐였지, 테렉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일까?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테렉산에게 이따위 하소연을 해봤자 그가 실마리를 제공해줄 리가 없다. 그럼에도 황제는 어릴때부터 자신을 수호해온 테렉산 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보였다. 그것은 어느정도의 신뢰를 뜻하기도 했 다. "......미란다가 없습니다." 황제의 두서없는 넋두리에 테렉산이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황제는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는다. 미란다가- 없다? 피의 살육제가 벌어진 날 황제는 미란다의 머리없는 시신을 붙들고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세상의 그 어떤 절규도 그보다 비통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이후 황제는 한번도 미란다를 찾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이 세상에 없는 인물인양, 그녀의 머리카락 한올조차 떠올 리지 않았던 것이다. 주르피오황제는 이제서야 그것을 깨닫는다. "미............란다는 어디에 있느냐?" "별궁에 안치해놓았습니다." 네켈시아르황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별궁은 후궁들의 거처다. 그렇기에 본궁보다 작은 크기지만 제법 화려했다. 황제는 시종장과 테렉산만을 대동하고 별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본궁의 정원에 비하면 턱없이 작고 아담하지만 그만큼 운치가 있는 정원 을 가로질러 별궁에 당도했다. 미란다가 있을때는 갖은 비단으로 치장되어 화려했던 별궁이 지금은 주인 을 잃고 을씨년스러울만큼 적막했다. "미란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더욱 가라앉게 만든 것은 별궁의 지하에 안치된 미란 다의 시신이었다. 그녀는 마치 살아있는 생시마냥 아름다웠다. 단지 다른것이라면 살아있을때보다 더 창백하고 싸늘한 피부, 그리고 장의 사의 솜씨로도 가릴 수 없는 목의 상처뿐이다. 테렉산과 시종장은 지하문에서 가만히 대기했다. "미란다.." 불러도 대답해줄 이는 이제 없다. 하지만 황제는 미란다의 시신을 앞에 두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쏟아지는 태양빛 아래 물결치며 반짝였던 그녀의 금빛머리카락은 이미 빛 을 잃고 바닥에 흐트러져 있었다. 황제는 건조한 눈동자로 뚫어지게 죽은 미란다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돌아가자."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짧막한 명령이었다. 없다. 무엇이? -미란다가 없습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없다. 없어....................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것만 같다. 그럼에도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 "흐흐흐.. 정신이 드느냐? 삼일이나 시간을 허비하다니. 이 몸이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느냐? 그러 니까 이제부터 대가를 치뤄야겠지. 난 기다리는 것을 아주 못참는단 말이 다. 네놈의 출신성분이 하도 가상해서 특별식을 만들어두었는데 기대만점 일 것이다. 흐흐흐흐흐......................" 흐릿하게 떠진 시야속에 음습한 천장과 함께 쭉찢어진 눈의 사내가 들어 왔다. 사내는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코속을 파고 드는 유황냄새속에 피 비린내가 섞여 있다. 어디선가 사람의 신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가인은 비쩍 마른 입술을 살짝 벌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탁한 공기가 폐부까지 곧장 지쳐들어간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살아 있었다. 10. "으윽....." 물먹은 솜마냥 몸은 마구 축축 늘어지는데, 아직까지 팔팔하게 살아있는 세포들이 고통을 호소한다. 바짝 말라붙은 목구멍에선 어서 물을 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인의 오감을 긴장시키는 것은 눈앞에 선 흉악한 몰골의 사마르칸다인이었다. "쓸데없는 것은 다 필요없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네놈의 태도에 따라 취급이 달라질 것이다. 물론, 다시는 두 다리로 걸어 나가지 못하리란건 기정사실이다만. 그래도 숨은 붙어있고 싶겠지? 자-, 이름이 무엇이냐? 그것부터 시작하자." 고문관 세세칼이 채찍 손잡이 부분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면서 한가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한쪽팔만으로 천장에 매달려 있던 가인은 그러나 지지 않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켈시아르황성의 지하감옥은 악명으로 이름높다. 죄가 있건 없건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죽거나 불구가 되어야만 나 올 수 있다. 그것을 반증하듯이 감옥의 내부는 더없이 흉흉하다. 벽 천장에는 길다란 쇠사슬들이 늘어져 있는데 쇠사슬마다 사람의 장기나 신체의 일부들이 매달려 있었다. 어떤 벽면에는 하반신이 잘린 사람의 시 체가 매달려 있었는데 완전히 뭉그러진 얼굴과 너덜거리는 살점들로 인해 얼마만한 고문에 시달렸었는지 극명히 알 수 있었다.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난무하고 끼익끼익.. 하고 무언가를 쥐어 짜는 기계 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하지만 가인은 어깨가 빠질 것 같은 고통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죽여서는 안된다는 황제의 어명으로 인해 다친곳에 약이 발라져 있었지만 관통상과 절단은 쉽게 치유될 상처가 아니었다. 급기야 한 손으로 전체 체중을 받치며 매달려 있다는 것은 약한 가인의 육체에 상당한 데미지를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문관인 세세칼에게는 별다른 감흥도 주지 못했다. 노련한 그는 죽지 않을 만큼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을 천가지쯤 알고 있었 다. 물론 그 모든 방법을 천천히 다 시현해 보일 용의가 있다. 세세칼의 물음에 가인이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빙 긋 웃었다. 툭 불거진 광대뼈와 양뺨에 난 검상으로 인해 웃는 얼굴조차 공포가 느껴진다. 세세칼이 손가락을 튕기자 뒤에 서 있던 보조관이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리고 짧은 시간안에 금발머리의 작은 소녀를 끌고 왔다. 벌거벗은 소녀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천 장에 매달려 있는 가인의 모습을 보고 신음을 삼킨다. 이마에 선연한 빛을 발하고 있는 붉은 보석.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직 어린 소녀였지만 분명히 알고 있었다. "와........." 왕자라는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그녀는 세세칼의 커다란 손바닥에 머리 채를 휘어잡혔다. "꺄악!" "무...무슨짓을 하려는 것이냐?!"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메마른 목구멍을 뚫고 겨우 흘러나왔다. 그러자 세세칼은 씩 웃으며 소녀의 여린 가슴을 거칠게 주물럭거리기 시 작했다. 아직 14살이나 되었을까? 사내의 손바닥보다 더 작아보이는 가 슴이 애처롭게 희롱당한다. 그럼에도 반항한번 하지 못하는 소녀의 얼굴 에는 이보다 더할 수 없는 공포가 서린다. "아주 먹음직스런 계집애다. 크세르 계집은 작은것이나 큰 것이나 좆이 쏠릴 만큼 예쁘구나." "흐..흐흐흐흑.......왕자님......" "살려달라고 말해보려무나" "으흑!" 손바닥으로 가슴을 주무르던 세세칼이 이번에는 엄지와 검지의 손끝으로 마치 떼버릴 듯이 소녀의 작은 젖꼭지를 비틀었다. 그러자 소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어서" "아학! 사... 살려주세요!" 피가 새어 나올만큼 세게 손톱이 박히자 소녀는 자지러지며 비명을 질렀 다. "그..그만해!" "흣,,흐흐.. 그럼 묻는 말에 답해보아라 이름이 무엇이냐?" "....................." "하긴 아직 본론도 꺼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겁을 집어먹으면 곤란하지. 어느정도는 버텨주어야 내가 재미있거든." 세세칼이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소녀의 귓가에 속삭이자 눈에 보일 정도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만.. 해... 나에게 하면 되지 않은가? 내가.." "물론. 진짜는 네놈이다. 이 예쁜 아가는 그냥 맛뵈기용일 뿐이야. 자- 어서 가져와라" "사....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 세세칼의 손짓에 보조관이 가져온 물체를 바라보며 소녀의 몸에 심한 경 련이 일기 시작했다. 공포로 가득찬 얼굴은 이미 핏기조차 가셔 새파랄 지경이며 커다란 초록 눈동자가 강한 애원을 담고 가인에게 향해졌다. "살려주세요, 왕자니임-----!" "그만둬! 그만둬----" "이런.... 착한 아가.. 말을 들어야지? 자, 입을 벌리렴. 너를 위해 맛있는 꼬챙이를 준비했다." "아악, 싫어요!!! 살려주세요, 왕자님!!!! 살려주세요--" "그만! 그만! 안돼----!" "쓰, 파닥거리기는. 크세르의 잡것들은 도대체가 말을 들어쳐먹질 않으니 원." "꺄아아아아아아-----------------------" 소녀의 애처로운 퍼덕거림은 그녀보다 세배나 큰 세세칼에 의해 제압당하 고 무기력하기만 했다. 가인의 한손은 천장에 고정된 사슬에 결박되었고, 다른 한손은 허리뒤로 묶여있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리 요동을 쳐봐야 아무 소용없는 것이었다. 이윽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코챙이가 소녀의 입안에 쑤셔박히고 만다. 치이이익-------- 소녀의 팔다리가 뼈없는 연체동물마냥 흐느적거렸다. 치지지직---------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그녀는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마구 잔경련을 일으 켰다. 그렇지만 잔혹한 사마르칸다의 고문장은 소녀의 고통에 찬 움직임마 저 봉쇄하고 더욱 깊숙하게 코챙이를 찔러넣었다. 살타는 냄새가 구역질이 날 만큼 끔찍하다. "제발.......................제발 그만둬--------" 어린 소녀에게 행해진 끔찍한 고문에 가인은 이미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이미 왕자로서의 긍지따윈 멀리 사라져버린지 오래다. 이건 이미 죽은 육체다. 이름또한 죽은 시체의 이름일 뿐이다. 무엇이 그리도 아깝겠는가...... 눈을 하얗게 뒤집고 경련을 일으키던 소녀의 작은 육체가 축 늘어져버렸 다. "쯧,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자빠지면 곤란하지." 그러나 별다른 감흥조차 느껴지지 않는 세세칼의 목소리에 보조관이 커다 란 물통을 소녀의 늘어진 육체에 들이부었다. 그럼에도 소녀가 정신을 차 리지 못하자 다시 불에 달군 쇠코챙이로 그녀의 허벅지를 지졌다. 또다시 살타는 내음과 함께 소녀가 경련을 일으키며 눈을 떴다. 세세칼에 의해 들어올려진 그녀의 얼굴은 보기에도 참혹했다. 탐스러운 붉은 빛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시커멓게 그을린 부분들이 서로 뒤엉켜 인간의 입술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힘없이 가늘게 뜨고 있는 눈동자에는 꾸역꾸역 눈물들이 비어져 나온다. 목구멍속에서 무언가 희미한 흐느낌이 나오는 것 같지만 너무나 작고 가 녀렸다. 사람을 사람이 아닌지경으로 만들었음에도 그들은 그녀에게 또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 가인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그만둬, 제발- 제발 그만둬어! 그건 저주가 아니야! 저주가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세세칼은 흉악한 얼굴로 씩 웃었다. "걱정마, 곧 네 차례가 올 테니까" "--------!!!!!!!!!!!!!!!!!" 소녀는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쇠코챙이에 입술이 문드러지고 혀가 타버린 그녀는 단지 부릅뜬 눈과 퍼 덕거리는 육체로 고통을 나타냈다. 보조관들에 의해 벌여진 다리 사이로 다시 한번 쇠코챙이가 들이쳐졌다. 희뿌연 연기가 그녀의 음부에서 새나왔다. 몇번의 잔 경련후..... 소녀의 팔 다리가 아래로 축 늘어져버린다. "씹... 벌써 죽었네?" "다른년을 가져올까요?" "아니, 됐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는게 좋겠지" 죽어.......버렸다. 이제 막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황금기를 맞이해야 할 꽃다운 나이에 말로 는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고문을 받으며..그녀는 죽었다........ 하지만, 잔악무도한 사마르칸다의 고문관들은 개미한마리 죽인것보다도 더 아무렇지 않게 지껄여댔다. 벌써 죽었네? 벌써 죽었네---? "이...인간도 아닌 것들.........어.....어떻게........어떻게........" 가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왔다. 아직 어린 소녀다! 반항조차 마음껏 할 수 없는 아이일 뿐이었다! 그런데.......그런데 어째서! "걱정하지말아라. 너도 곧 이렇게 될테니까" 피빛으로 충혈되어버린 가인의 눈을 바라보며 세세칼이 여유있는 목소리 로 말했다. 그는 마치 아주 재미있는 것을 감추고 있는 소년처럼 들뜬 모 습이었다. 소녀의 시체가 치워지고 보조관들이 불에 달구어진 쇠코챙이들을 들고 나타났다. "자-, 어디부터 해줄까? 눈? 코? 입? 아님 저년처럼 아랫도리를 지져줄까? 남자는 자궁이 없으니 차라리 여길 문드려줄까? 다시는 사내구실 못하게..........흣흣흣..........어느 쪽이든 좋겠지. 어차피 성할 곳은 아무데도 없을테니. 말해봐라, 더러운 개야. 황제께 무슨 저주를 걸었느냐? 네놈의 잔당들이 몇이나 남았지? 응?" "나를 죽여라.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이다." 가인의 곁에 다가와 악취나는 혀를 놀리던 세세칼의 움직임이 멈췄다. 대신 굳은살이 베인 거친 손가락으로 가인의 은회색 눈커플을 쓰다듬었다. "눈부터 하자." "-----!!!!!!!!!!!!!!!!!!!!!!!!!!"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소녀의 입과 아래에서 피어올랐던 것과 똑같은 연기다. 또한 똑같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비명은 없다. 치지직.......살점이 문드러지고 피가 나올새도 없이 증발해버렸다해도............ 그는 차라리 혀를 깨물었다. "으아아악------!" 며칠째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했던 황제가 왠일로 오후부터 침소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주르는 오른쪽 눈을 감싸안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막 주르의 잠시중을 마치고 돌아서려던 시종장 토라타가 깜짝 놀란 얼굴 로 침상으로 다가왔다. "눈이......... 눈이!" "어서 빨리 의약사들을 들라 하라!"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주르의 용안에 심상치않음을 느낀 토라타가 급히 다 른 시종에게 명했다. 그의 명령에 시종들이 잽싸게 달려나갔다. 잠시후, 세명의 의약사들이 허둥지둥 황제의 침소로 찾아왔을 때, 어이없 게도 황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악몽을 꾼 것 같다. 걱정말고 숙소로 돌아가라. 잠을 깨워 미안하구나." 그리고 여느때와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정말로 괜찮으신 것이온지요? " 가장 경험많은 의약사가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황제는 약간 찌푸려진 얼굴 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제서야 의약사들은 조그만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하지만......... 주르는 다시 잠을 청하지 못했다. 토라타까지 물리고 혼자 누웠지만 너무나도 강렬한 고통이 아직까지 잔물 결처럼 남아 있다. 마치.. 무언가로 찔리는 듯한.................. 그러나 이내 사라져버린 고통은 꿈인듯 꿈이 아닌 듯, 너무도 생생했다. ......아니다. 필경 마음이 어지러워 생긴 악몽이겠지. 주르는 다시 이불을 어깨위까지 덮으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보니 혼자 잠자리에 드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늘 미란다와 함께 였는데 요 며칠간 상처 때문에 혼자다. 아니, 미란다는 이제 없다. 그녀는 죽어버렸다. 다시는 그녀와 함께 잠을 잘 수 없을 것이다. 그녀의 반짝이는 금발머리가 떠오른다. 바람에 굽이치며 찰랑거릴 때 너 무도 아름다워 감격하고 말았지........ 겁에 질린 사슴처럼 큼직하기만 한 초록색 눈동자가 항상 물기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크림같은 하얀 피부와 분홍빛의 입술이 얼마나 탐스러웠는지...... 그랬는데, 그녀의 차가운 시신을 맞댄 순간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세상에 반려자는 그녀 한사람 뿐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사랑했것만 마 치 딴세상의 일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 감정들이 이질적이기까 지 했다. 배신자에 대한 고통이나 분노조차 없었다. 뭘까 이것은? 이것도 저주의 일종인 것인가? 저주. 그것을 떠올리자 또다시 가슴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온통 피를 둘러쓴 은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본다. 그의 비틀린 자주색 입술이 광기를 담고 웃었다. 두근........두근.......... -내게 무슨 저주를 걸었느냐? 두근........두근......... -말해라, 내게 무슨 저주를 걸었느냐!!!!!!!!!!!!!!1 심장이 맥박한다. 체념과 슬픔, 그러나 그만큼의 저주를 담은 눈동자가 피빛을 머금고 눈앞 에 있었다. '저주다! 저주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만해라, 제발 그만해!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대체 뭐냐, 이 상실감은? 숨이 막혀 참을 수가 없다!' 무언가가 없다. 미란다가 아니다. 미란다 따위가 아니야!!!!! 뭐냐, 뭐가 없는 것이냐? 알 수 없는 적막감이 사지를 뒤틀며 주르의 전신에 엄습해왔다. 하지만 답은 알 수 없다. 아는 것은 단 한가지, 저 빌어먹을 크세르의 왕자가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 다는 사실 외엔. 순간 주르는 튕기듯이 몸을 일으켰다. 노래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것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그는 비단가운을 걸치고 황급히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까만 어둠이 융단처럼 펼져졌다. 온통 까맣기만한 정적속에 달빛이 고고로운 자태로 내려앉았다. 그것은 마치 조명처럼 허공속에 흩날리는 하얀 머리카락들을 반사해냈다. "네, 네놈이 어떻게!" 너무나 놀라버린 주르였지만 그것을 발견한 순간 머리꼭대기까지 차오른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다시 침소로 달려가서 침대맡에 언제나 비상용으로 숨겨놓은 단검을 찾아낸다. 그리고 빠른 동작으로 테라스로 나왔다. 그것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여전히 낡아빠진 하프를 타며 은은한 허밍을 내뱉고 있다. 언제나처럼 맑고, 끝을 알 수 없는 슬픔이 차오르는 목소리로.......... 하지만 이제는 그따위 것에 속지 않는다. 어떻게 지하감옥을 빠져나왔는지 알수는 없지만 단죄하고 말리라. "죽어라, 저주받을 족속아!" 주르는 검을 곧추세우고 단숨에 가인을 향해 돌진했다. 세상의 모든 분노와 증오를 담아. 그 순간 먼곳을 향해 있던 은회색 눈동자가 주르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쳐 졌다. 그리고 자주빛 얇은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빙긋 미소짓는게 아닌가! 주르의 움직임이 거기에서 멈췄다. 칼날이 가인의 목, 바로 앞에서 정지되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두- 근-! 바람이 방향을 바꾼다. 허공속에 흩날리던 하얀 머리카락들이 이번에는 주르의 전신을 감싸고 돌 았다. 그와 함께 유혹을 담은 사향냄새가 코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심장이 다시 한번 날뛴다. 두- 근-! "이건.......꿈이야......." 그는 맥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일게 분명한 환상은 더욱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급기야 손을 쭉 뻗는다. 주르는 마치 홀린 듯 그 손을 잡았다. 저것은 원수다. 당장에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러나 본능은 생각보다 앞섰다. 미란다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손보다 훨씬 못한 거친 손가락이었다. 좀더 크고, 단단했다. 자주빛의 입술이 다가왔다.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숙명처럼 주르는 그의 입술을 덮었다. 그리고 100년이나 굶은 사람처럼 그의 입술을 빨고 혀를 휘감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휘감으면서 주르는 생각했다. -이건 꿈이야. 그러나 가슴속에 차오르는 희열과 더할수 없는 감동은 꿈이라고만 치부하 기에 너무나도 생생한 것이었다. 12. -----와장창창창창! "꺄아악!!" "폐...폐하......." 사마르칸다 최고의 장인이 평생을 바쳐 완성하여 선황 하이넨샤에게 바쳤 다는 조각품이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그 뿐만이 아니다. 온갖 장식품들이 예술적 가치를 떠나 쓰레기가 되어 바닥에 뒹굴고 있었 다. 시종들은 거의 파랗게 질려서 감히 황제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한쪽 구석에 서서 벌벌벌 떨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은 편이다. 직격으로 촛대에 머리를 맞은 주술사는 이 마에서부터 턱까지 피를 뚝뚝 흘리면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고, 의약사들은 그저 죽여주시옵소서라는 모습으로 완전히 바닥에 붙어 부들부들 떨어댔 다. 평소 온화하게 미소짓던 황제의 모습이 아니었다. 수면부족으로 인해 검었던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되었고, 일그러진 얼굴은 지옥에서 막 나온 악마와도 같았다. "뭐, 아무 이상이 없어? 쓸모도 없는 돌팔이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것이냐?!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거냐? 봐라!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지 경이란 말이다!!!!" "히이이익, 주... 죽여주시옵소서~~~~~" 성질을 못이긴 황제가 의약사의 멱살을 들어올리자 그는 어린아이처럼 눈 물을 쏟으며 울기 시작했다. 한심해진 황제는 의약사를 휙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시선을 막 정신이 들기 시작하는 주술사에게로 돌렸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어떤 저주가 나를 감싸고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느 냐--?!" "폐......폐하....... 차라리... 죽여주시옵소서......." "죽여? 죽여? 죽여달라고!!! 하-, 평생동안 한가지만 연구하고 매달려온 녀희들이 고작 이런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한단 말이냐-! 신관 나부랑이들은 은혜의 문신 어쩌구하며 발뺌 하고 주술사나 의약사들 은 그저 죽여만달라고 애원이라니........ 대체 사마르칸다에 제대로 된 자들 이 이리도 없다는 것이냐! 사마르칸다내의 모든 도서관을 다 뒤져서라도 저주의 근원을 밝혀내라! 만일 이틀내로 밝혀내지 못한다면 너희의 목숨은 물론이고 3대까지 멸하 리라! 알아들었으면 썩 물러가라!!!!" 황제의 일갈에 의약사와 주술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물러가버린다. "테렉산!" 그들이 물러가자 황제 주르는 멀찍이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테렉산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머리를 조아리며 다가왔다. "그자는 어찌 되었느냐! 아직도 토설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거냐?" "...지독한 자이옵니다." "빌어먹을! 고문관의 솜씨가 너무 무딘 것이 아니냐!" "그렇진 않을 것입니다. 고문관의 솜씨는 대륙내에서도 악명으로 자자한 자이옵니다." "그런데 아직도 알아내지 못하다니! 이번달의 임금은 지급치 말라! 능력없는 자에게 주는 돈은 한푼도 아깝다! 흐읍, 이런........" 험악하게 말을 내뱉던 황제가 미간에 주름을 세우며 고통스럽게 일그린다. "가슴이.....뛴다.............. 젠장.... 젠장-!" "고정하시옵소서-" "고정하라고? 지금 고정할 때인가?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이 내가! 그런데 어떤 저주에 걸린 줄도 모르고 고칠 수 있는 자 조차 없다! 은혜의 문신? 하-, 대신관이란것들이 황제와 황태자에게만 새겨준다는 극 비의 문신도 소용이 없지 않느냐! 무토마라신의 권능까지도 무마시킬 수 있는 저주라는게 세상에 존재한다니.... 대체 그 크세르 쪼가리가 무어라 고!" 황제는 정말로 분하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인간도 아니었다. 한갖 짐승이었으며 마음껏 짓밟아도 상관없는 노 예였다. 이미 멸종단계에 있는 종족의 부스러기 주제에 대륙최강의 황제 에게 이런 수모를 안겨주다니...... 참을 수도, 참아서도 안되는 문제였다. 미란다와 함께였던 시절에는 이런식으로 크세르인을 경멸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연민과 동정뿐이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온화한 표정도, 부드러운 목소리조차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직 일그러진 분노뿐이다. ".......테렉산...... 지금 당장, 하슈멜에게 가라. 그에게 사마르칸다내의 모 든 크세르의 잡것들을 모아오라하라. 암컷은 물론이고 갓 태어난 새끼에 서부터 골방에 감춰놓은 수컷까지. 내놓지 않고 숨기는 자들은 그 자리에 서 목을 베어버려라! 알겠느냐? 사마르칸다에서 다시는 그 썩을 것들이 숨쉬지 못하도록 모조리 잡아들이란 말이다--------------!" 노호성을 외치는 황제의 눈은 이미 총명하고 온화한 그것이 아니었다. 시뻘겋게 변해버린 분노와 증오, 오직 그뿐. 사마르칸다 제국력 32년, 란 주르피오가 황제로 등극한지 2년 반. 바야 흐로 광황제의 공포정치가 서서히 서막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샤카에 흉흉한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묘하게 가라앉아버린 거리의 기운은 축제의 흥겨움따윈 찾아볼 수조차 없 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소문으로만 들어봤던 아름다운 크세르의 요녀들의 실체를 목격할 수 있었다. 과연 소문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온몸에 휘감긴 쇠사슬과 거친 병사들의 태도속에 감탄은 목구멍속 으로 사라지고 그저 침묵 뿐이다. 단지, 어린아이들만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녀들의 미모에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나마도 어른들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아 소리가 새는 것을 막 아버렸다. 이것은 또하나의 전설이 될 것이다. 아름다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말이다...... 네켈시아르황성이 어느때보다도 밝은 햇살아래 거대한 자태를 드러냈다. 간간이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나비들이 한가로이 꽃을 찾아 날아다녔다. 지극히 평화롭고 여느때와 같은 일상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의 세상은 그렇지 못했다. 네켈시아르황성의 광장에 통나무들이 산처럼 쌓였다. 그위에 나무로 만든 우리가 놓여졌다. 사람 3백명쯤 수용될 수 있는 커다란 크기였다. 이윽고 사마르칸다 병사들에게 이끌려온 크세르인들이 쇠사슬에 연결되어 나타났다. 대부분이 여자들로 간간이 품에 안긴 갓난아기와 어린 여자아이 들도 있었다. 또한 깡마르고 퀭한 얼굴의 남자들의 모습도 몇 보였다. 그들은 사마르칸다 병사들에 의해 통나무위의 우리로 걸어올라갔다. 이것의 용도가 대체 무엇인지 모르지만 갑작스럽게 지하에서 꺼내져 결박 당한채 끌려온 만큼 범상치않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꽁꽁 묶여있는 상태에서 반항이란 꿈조차 꿀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그저 무방비한 채로 벌벌 떠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마지막 한사람까지 우리에 집어넣어지고, 드디어 문이 닫혔다. 이어 팡파레가 높이 울려퍼지며 병사들이 쏟아져들어왔다. 그들은 광장의 바깥쪽으로 둥근 원을 형성하며 둘러쌌다. 높이 쳐든 뽀족한 창날이 당장에라도 살갗을 뚫을 듯 햇빛에 번쩍인다. 또다시 팡파레가 울리며 누군가 '황제폐하 납시오-'라고 크게 외쳤다. 크세르인들이 흠짓 어깨를 움츠리며 계단위를 쳐다보았다. 광장보다 40계단쯤 높은 곳에 황제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황금색 비단으로 휘장을 치고 황제의 위용에 걸맞는 화려한 의자가 놓여 져 있었다. 근위대가 먼저 입장하고 이어 대신들과 황제가 나타났다. 정장을 갖춘 대신들은 직위에 따라 상위대신이 흰색, 중위권은 붉은색, 하 위권은 초록색으로 분류되었다. 황제는 황금실로 수놓은 검은망토와 흰색 의 편안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준비된 의자에 앉자 대신들도 한단 아래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그들의 뒤에 근위병들이 날카로운 얼굴로 경계를 선다. 주르는 우리안에 갇혀있는 크세르인들을 바라보며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 다.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그들은 화장이나 보석조차 없이 태고적 모습 그대로였다. 그 모습이 진짜 짐승들 같아 웃기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차피 한꺼플 벗겨보면 황제인 자신과 그들이나 다를것이 없을터, 그러나 다수의 힘에 짖눌려 반항조차 못하는 그들은 마치 벌레와도 같았다. 한때 그가 목숨처럼 사랑했던 여인이 저들 중 하나였다는 것은 이젠 생각 조차 나지 않는다. 남아있는 것은 오직 증오와 미움 뿐이다. 감히 벌레 주제에 하늘같은 황제에게 저주를 건 크세르의 쪼가리 왕자! 어떤식으로든 그자에게 다시없을 고통을 선사하고 싶다. 그것만이 주르의 머리속을 채우고 있었다. 우리속의 크세르인들을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던 주르황제가 간단하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신호를 알아들은 시종장 토라타가 큰 목소리 로 외쳤다. "죄인을 대령하라!" 토라타의 목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절그럭 거리는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 왔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대신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아무리 죄인이라지만 밤에 보기 무서울 만큼 처참한 몰골이었다. 주르 역시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크게 떠진 검은색 눈동자속에는 경악마저 어려있다. 그가 고문하라 명했다. 무슨짓을 하던 상관없다 말했다. 하지만 대체 뭔가? 왜 숨이 막히는 거지? 아니, 아니.............숨이 막힌다기 보다는........ 아프다.... 아니, 아픈게 아니 라... 쥐어짠다.........심장이........무언가로 마구 쥐어짜는 것 같은..아니야, 아 니야! 모르겠다. 이게 무언지 모르겠어. 감정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주르는 결코 내색조차 없이 끝까지 죄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점점 그가 가까워질수록 고개를 돌리고픈 충동으로 아우성이다. 그, 크세르의 왕자의 몰골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조차 없이 엉망이었다. 저것은 이미 인간이라는 껍데기가 아니었다. 절그럭..........절그럭........ 양발을 연결한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울린다. 그나마 걸어온 길 뒤에는 붉은색의 발자국이 뚜렷하게 새겨졌다. 어쩌면 발바닥에 못이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세세칼이 죄인들을 다룰 때 즐겨쓰는 고문법이었다. 비틀.......비틀.......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하면서도 그는 고집스럽게 두 다리로 걸었다. 청명한 태양아래 드러난 가인-크세르의 세 번째 왕자는 저 아래 우리속 에 갇힌 크세르인들과 마찬가지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였다. 이미 인간도 아닌 죄인일뿐, 죄인에게 인간의 문명이란 필요없는 것, 그것은 수치와 굴욕감을 더욱 배가시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덕분에 악명높은 세세칼의 고문을 받은 육체가 태양아래 적나라하게 드러 났다. 뜨겁게 달군 쇠코챙이로 쑤셔파버린 오른쪽눈과 주변의 피부는 이미 새 카맣게 죽어 있었고, 더불어 화상자국이 얼굴의 반을 온통 일그러놓았다. 머리카락마저도 듬성듬성 뽑혀져나가 과연 며칠전 화사하게 빛나던 그 은 백색 머리카락이 맞는가 싶을 정도다. 주르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감쌌다. 언젠가 갑자기 엄습했던 눈의 통증이 새삼 되새겨진 까닭이다. 그러나 단지 환상이었음을 증명하듯이 황제의 눈은 멀쩡했다. -차라리 죽여달라 외치게 되리라. 그말, 그대로였다. '제발, 죽여줘!' 무지막지한 힘으로 생눈알이 파헤쳐지고 깊숙한 곳에 위치한 여린 살결들 이 불길에 지져졌다. 가혹한 매질과 이어지는 소금물세례........ 며칠이나 물한모금 마실 수 없었으며 잠조차 잘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흐렀는지 자각조차 못하는 사이 어느 순간 그는 애원하고 말았다. -차라리 죽여줘. 그것은 흐느낌과 같이 가늘게 세어나왔다. 이빨마저 거의 뽑혀져나가 발음조차 정확하지 않았지만, 하나남은 은회색 눈동자는 너무나 절실했다. 흐흐흐....... 아니, 아직 절반도 가지 않았단다. 진짜 즐거움은 남겨두었단 말이다. 그러나 세세칼은 즐겁다는 듯이 더욱 히죽일 뿐이었다. 이제는 시력조차 흐릿하다. 영영 장님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차라리 저 흉악한 사마르칸다인이라도 좋으니 제발 죽여주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삶에 대한 의욕조차 없었다. 그는 이미 죽은자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소원은 무참하게 찢겨지고 또다시 소금물이 전신에 뿌려졌다. "크아아아아---------!" 손톱, 발톱이 하나하나 빠져나가버린 지도 이미 오래다. 저 무자비한 사마르칸다인은 마치 호두껍질을 으깨듯이 흥얼거리면서 가 차없이 뽑아냈다. "말해라, 황제에게 어떤 저주를 걸었는지" 그리고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흐.......흐으으..................저........저주......따위......................... 아니다.........아니란....말이다........." "훗, 좋아. 계속 그렇게 즐길 수 있게 해다오" 필사적으로 말하는 가인의 말에도 불구하고 세세칼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 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리고 이미 화상으로 뭉개져버린 가인의 오 른쪽 유두를 자신의 뾰족한 손톱으로 가차없이 긁어냈다. "으아아아악!!!!!!!!!" 살점이 손톱사이에 긁혀져 나왔다. "말해라, 어떤 저주를 걸었느냐!" "아아아아---- 아-.......아니야...........저주가...................저주가........아니야........" 촤악! 촤악! 가차없이 채찍이 휘둘려진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잃을라치면 소금물이 전신을 뒤덮었다. 벌써 몇번의 반복인지 모른다. ----차라리 죽여라 그럼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이다! "끈질긴놈, 정녕 바른대로 고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좋아 어디까지 견딜 수 있나 두고보자, 개새끼야!" 어느새 세세칼마저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다. 그는 흉폭한 얼굴을 잔뜩 일그리며 보조관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시퍼렇게 날이선 단검을 가져왔다. "잘라버려!" "왕자님............?" "세상에, 왕자님-----?" "왕자님께서 살아계셨어!" 우리속에 갇혀있던 크세르인들이 계단위에 모습을 드러낸 벌거벗은 인영 을 바라보며 술렁였다. 크게 떠진 초록눈동자속에 선연한 붉은 보석이 비춰졌다. 그것은 상징이다. 오직 그들의 지도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함과 정결함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경악과 흥분도 잠시, 그들은 절망의 탄식을 내뱉어야 했다. "왕자님-!" "왕자님---!" 빛의 여신 나타르타의 상징답게 크세르의 왕족들은 살아있는 빛이었다. 그 어떤 것도 그들의 고결함과 성스러움에 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짐승처럼 우리안에 갇혀있는 크세르인들 앞에 나타난 것은 더 이 상 고결하지도, 성스럽지도 않은 그저 다 죽어가는 시체였다. 목과 손목, 그리고 발목까지 이어진 쇠사슬에 온몸이 결박당한, 그리고 여 신의 성화(聖火)처럼 밝게 빛나는 태양아래 드러난 알몸뚱이는 자신들과 별반 다를바 없이 약하고 약한 인간쪼가리였다. 더구나 남성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이 반이나 뭉텅 잘려 있었다. 거세당한 것이다. 이미 왕자도 남성도 아닌 그저 고깃덩이처럼. 그것은 거세당해 인간도 아니게 되어버린 크세르인들의 현재의 상황과도 같았다. 거세당한 것은 왕자가 아니다. 온몸이 짖문들어지고 피칠갑이 된 것은 왕자가 아니라 크세르 그 자체였다. 사마르칸다의 잔인한 고문장은 크세르인들에게 지상최대의 굴욕을 안겨준 것이다. 그러나 크세르인들은 자신들의 상징에 대한 그리움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오랫동안 그들의 머리에 주입된 복종사상의 결과인지도 모른 다. 비참할대로 비참한 찢겨진 육신이라도 그는 왕자였다. 고귀하고 고귀한 여신의 상징이었다. 참담함과 목매이는 슬픔으로 모두가 눈물짓는다. 난교파티에서 죽어간 그들처럼 안타까운 눈을 하고 우리밖으로 손을 뻗는 다. 어느 한순간은 분명 미웠다. 때론 저주하기도 했을 것이다. 너희 때문에 우리가 이리 되었다! 하지만 분노의 조각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신들보다 더 끔찍한 몰골로 서 있는 왕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한다. 그 어떠한 육체적 굴욕이 행해진 몸뚱이라할 지라도 당신은 우리들의 왕 자님이랍니다. 당신은 언제나 우리들의 왕자님입니다. 하지만............ 왕자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겨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분히 굴욕이며, 수치다. 왕자라 부르지 말라, 차라리 돌을 던져라! 지켜주지 못한 무능함을 탓하고 당장 죽어버리라 증오해준다면 스스로 땅 에 머리를 박고 죽을 수 있으련만, 그러한 열망조차 안타깝게 자신을 부르 는 사람들 때문에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크세르인들의 흐느낌과 외침들이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거세지기만 하자 하슈멜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광장 주변에 배치된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곧추세웠다. 삽시간에 떠오른 흉흉한 살기에 크세르인들은 몸을 움츠리며 단번에 울음 을 멈춰버렸다. 이미 각인된 사마르칸다병사들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잘 길들여진 짐승으로 탈바꿈시킨 까닭이다. 그러나 비통한 초록 눈동자들속에는 아직도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금새 고요하게 가라앉아버린 주변에 만족을 표하며 하슈멜이 왕자에게 다 가갔다. "이름이 무엇이냐, 크세르의 왕자야" 구릿빛피부와 매서운 눈동자, 그리고 얼굴의 반이상이나 덮고 있는 검은수 염 덕분에 그의 인상은 누구보다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금방 죽어자빠져도 하나도 이상치 않을 것 같은 크세르의 왕자는 껍질이 다 벗겨져나가 핏기조차 없는 입술을 오히려 꾹 다물어버린다. 죽음보다 더한 고문속에서 차라리 죽여달라 외치던 입술이었다. 하지만 밝은 태양아래, 거세당한 치부조차 가리지 못하고 비참한 몰골을 모두의 앞에 드러낸 지금, 그는 마지막 한가닥 남은 자존심을 위해 말하기 를 거부했다. 앞으로 어떤일이 벌어지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 목숨이다. 오른쪽눈의 실명과 함께 왼쪽눈의 시력마저 급격히 떨어졌다. 그는 하슈멜의 말을 무시하고 뿌옇기만한 왼쪽눈으로 그저 먼 곳을 응시 할 뿐이었다. "황제폐하께 어떤 저주를 걸었느냐?!!!" 입을 다물어버린 그의 태도에 하슈멜대장이 더욱 크게 소리질렀다. 누구라도 어깨를 움찔할 정도로 큰 목소리였지만 그는 조금의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하슈멜이 채찍을 휘둘렀다. 긴 포물선을 그리며 위로 솟구쳤던 그것은 정확히 왕자의 상처투성이 등 을 맹렬하게 후려쳤다. "크윽!" 왕자는 신음을 내뱉으며 종이장처럼 고꾸라져 버렸다. 화상과 채찍자국으로 심하게 너덜거리는 등은 피조차 깡그리 말라붙었을 것 같았지만 하슈멜의 채찍이 닿자 금방 선연한 핏자국이 새겨졌다. 크세르인들이 다시 한번 눈물을 머금으며 안타까운 탄식을 보냈다. 쓰러져버린 왕자는 부들부들 떨며 차마 일어서지도 못했다. 대신 근위병들 이 그의 머리채를 붙잡고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것들을 대령하라!" 다시 한번 채찍질을 할 것 같던 하슈멜이 의외로 채찍을 옆으로 치워놓고 시종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시종이 재빨리 어디론가로 뛰어갔다. 황제는 아무말 없이 의자에 앉아 가인의 상처투성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피냄새가 자신이 앉아있는 곳에까지 흘러드는 것 같았다.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종이 사라지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후, 갑자기 크세르인들이 갇혀있는 우 리 옆에서 땅이 갈라지며 또하나의 땅이 솟아올랐다. 광장은 대단히 넓은 크기로 여러 가지 스포츠가 행해지는 장소이기도 했 다. 그래서 여러 가지 장치들이 숨겨 있는데 이것도 그것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솟아오른 것은 스포츠를 위한 여흥이 아니었다. 인간이 아니라 돼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뒤룩뒤룩 살찐 인간이 나무기 둥에 결박당한 채 나타났다. 아불타였다. "사........살려주십시오-! 소인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아불.........타? 왕자는 청각으로 아불타를 알아보았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황제폐하, 이러실수는 없습니다! 소인이 사마르칸다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제가 없으면 사마르칸다의 시장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디, 부디 굽어살피소서--------" 항상 여유있는 미소를 머금고 친절하게 말하는 아불타였다. 하지만 사지가 결박당한 채 묶여있는 지금, 부릴 수 있는 여유란 없다. 그는 불쌍하리만치 부들부들 떨어댔다. 하지만 하슈멜은 고사하고 내려다보고 있는 대신들조차 아무런 미동이 없 었다. 황제는 두말 할 것도 없다. "다음것도 대령하라!" 하슈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른쪽 바닥이 갈라지며 땅이 하나 더 솟아올랐다. 그러자 이제까지 마구 소리치던 아불타의 기름진 얼굴에 이보 다 더 할 수 없다는 경악이 떠오른다. 그의 가장 사랑하는 딸 해사화가 결박당한 채 올라온 것이다. 아불타와 다른점이라면 그녀는 알몽인데다가 탁자처럼 긴 것에 상체를 엎 드리고 양다리가 벌려진 상태로 묶여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링가 한 마리 가 그런 해사화를 노려보고 있었다. 링가는 사마르칸다인의 키에 육박할 만큼 커다란 덩치를 가지고 있다. 입밖으로 삐죽이 내밀어진 두 개의 송곳니와 시뻘건 눈동자가 바라만 보 기에도 오금이 저려올 만큼 공포스러운 맹수다. 그 맹수가 목에 쇠사슬을 감고 있다지만 지척의 거리에서 해사화를 노려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버지...?" 그토록 아름답고 총명하던 그녀였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여느 인간과 다 를바 없이 두려움에 벌벌 떨 뿐이다. 수치고 뭐고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 다. "해사화야! 폐.........폐하, 어찌!!!!!!!" 자신의 목숨조차 풍전등화이거늘 너무나도 경악스런 자식의 모습에 아불 타는 경악했다. 아무리 그가 대죄를 저질렀다해도 이건 아니다. 자신이 직접 역모를 꾀한 것도 아니었다. 그 자신도 속은 것이라 할 수 있 다. 속은것도 죄라하면 그에 합당한 형벌을 각오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런 꼴을 당할 만큼의 대죄는 아니라고 믿는다. 그리고 아불타가 누구였던가- 대륙의 상권을 주무르는, 황제보다도 더 큰 재물을 손에 쥔 대거상이 아니 던가?! 그가 사라진다면 당장 사마르칸다의 시장경제가 혼란에 휩싸일게 볼보듯 뻔하다. 하지만 황제는 그런 사정따위 상관조차 없다는 듯 무미건 조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너를 마샤카로 인도한 아불타부녀가 저기 있다. 죄인에게 합당한 벌이 내려져야 마땅하겠지?" 하슈멜이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곧장 손을 들어올렸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랑가의 목과 연결되어 묶여있던 쇠사슬이 병사들에 의해 풀어졌다. 해사화가 먼저였다. "꺄아악, 아버지----------!" "안돼에에에---------------------" 해사화의 비명과 함께 거대한 링가가 그녀를 덥쳤다. 여린 감성을 지닌 크세르의 여자들이 눈을 감으며 비명을 질렀다. 대신들마저 눈살을 찌푸리고 신음을 삼켰다. 그러나 황제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링가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몇시간전에 맞은 최음제가 이미 아플만큼 링가의 전신을 죄여온 탓이다. 링가는 본능이 명하는대로 암컷냄새가 풍기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자신의 수컷을 암컷의 구멍으로 밀어넣었다. "꺄아아아아--------------------------" 수간이었다. 그것은 사마르칸다의 오랜 전통중 하나로 타락한 여자에게 행해지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기도 했다. 링가는 거대한 덩치와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지만 시력이 약했다. 그래서 발정기 암컷의 분비물을 여자의 자궁에 묻히면 시력이 약한 링가 는 냄새만으로 암컷이라 단정하고 달려드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링가암컷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면 단숨에 물어죽인다. 하지만 이렇게 최음제를 잔뜩 먹여놓는다면 링가는 본능에 의 해 약기운이 풀릴때까지 계속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약에 찌들어버린 링가는 평소보다 배의 힘을 발휘한다. 결국 대부분의 여자들은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태반이다. "무...무슨..무슨일이지?" 잔혹하게 메아리치는 비명소리에 왕자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짝 마른 목구멍속에서 나오는 목소리라고는 옆사람이나 간신히 들릴까 싶을 만큼 가날펐다. "해사화아아-------" 아불타가 울부짖었다. 그러나 그의 비통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는 굶주린 개들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크아앙-!" "으아아악!!!"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상태로 보아 며칠이나 굶었음이 분명하다. 병사들이 목줄을 풀어주자 아불타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무...무슨 일이야. 대체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크아앙-- 사...살려줘! 우아아아악! 꺄아악, 맙소사! 살려주세요, 흐흐흑흑, 무서워.. 하악, 하흡! 그르르르릉.......................... "제발, 제발 그만둬-" 피냄새다. 사람들의 비명과 아우성속에 구역질 날 정도로 진득한 피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제발.......저주가 아니야.." 바짝 마른 목구멍이지만 왕자는 필사적으로 말하려고 애썼다. "저주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결국 입안에서만 맴돌던 목소리가 드디어 외침이 되어 터져나왔다. 그야말로 필사를 담은 외침이었다. 그러자 메마른 얼굴로 앉아만있던 황제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병사들에 의해 간신히 서 있는 왕자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주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냐" 낮은, 그러나 억눌린 분노가 내포된 목소리였다. 왕자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뿌연 시야속에 커다란 검은 사내가 들어온다. 또한 황제의 검은눈동자속에 오른쪽이 뻥뚫린 기괴한 얼굴이 클로즈업 되 었다. 순간 가슴이 크게 두근! 하고 뛰었다. "나를 죽이고 싶겠지?" 심장의 박동을 무시하고 씹어삼킬 것 같은 목소리로 황제가 말했다. 그러자 왕자의 왼쪽눈에 더할 수 없는 비통함이 어린다. 아불타의 다꺼져가는 비명소리와 해사화의 비참한 신음소리가 여전히 귓 가를 어지럽히는데 황제의 증오에 찬 작은 목소리만이 그의 전신을 감쌌 다. "날 죽여 없애기 위해 저주를 걸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네놈이 목숨을 걸고 마샤카까지 왔을리 없지! 하지만 난 죽지 않아! 결코 죽을 수 없다! 네가 나를 죽이기 위해 저주를 퍼부었지만, 보아라 어리석은 왕자야! 너의 어리석은 과용이 부른 대가를 똑똑히 지켜보거라. 오늘부터 사마르칸다는 물론이고, 대륙내에 크세르의 종자들을 싸그리 불 태워버리리라. 단 한줌의 남김도 없이 모두! 그것이 네가 치뤄야 할 대/가/다!!!" 황제의 팔이 힘차게 옆으로 뻗음과 동시에 비단망토가 펄럭였다. 윤기흐르는 검은망토와 화려하게 수놓아진 금사가 태양빛에 아름답게 번 쩍였다. 그것을 신호로 병사들이 움직였다. 이윽고 아불타 때의 비명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비명소리가 귀청을 찢는다. "꺄아아아아아아----------------------------------!!!!!!!!!!!!!!!!!!!" 불꽃이 피어올랐다. 병사들은 저마다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있었고, 망설임없이 우리 밑 에 쌓여있던 장작더미들에 쑤셔박아넣었다. 이미 기름칠이 되어 있던 마른 장작들이 시뻘건 불꽃을 토해냈다. 여자들이 울부짖었다. 커다랗게 떠진 초록 눈동자와 새하얀 얼굴, 하얀 얼굴 덕분에 더욱 도드라 진 빨간 입술이 바라만 보기에도 감탄이 날 만큼의 미인들이었지만 공포 속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끔찍하게 울부짖는 와중에도 그녀들은......... 아름다웠다. 처참할 만큼. "아...안돼...............제발....." 경악과 절망이 왕자의 육체를 휘돌았다. 그는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의 아픔따위를 느낄 겨를도 없이 절망으로 찌 푸려진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미 형편없이 갈라지고 쉬어버린 목소리였다. "저주 따위가 아니야, 제발, 제발 부탁이니.." 하지만 대답조차 없다. 매캐한 냄새가 넓은 광장안을 가득 채운다. 그에 따라 비명소리가 더욱 크게 울부짖는다. -꺄아아악! -자비를! -제발, 살려주세요!!! 콜록, 콜록, 콜록! 크세르인들은 연신 기침을 하며 우리에 매달렸다. 이미 아불타는 반이상이나 개들에게 뜯어먹혀 죽어버렸다. 해사화 역시 쇼크와 충격으로 이미 반쯤 죽어있는 상태였다. 광장은 비명과 통곡, 그리고 피냄새와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다. "저주가...............저주가 아니야- 그건 추............축복이야. 축복이었단 말이다!" 동족들이 산채로 죽어가는 상황에서 왕자는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반패닉의 상태에서 결코 말하지 않으리란 진실을 털어놓고야 만다. "하-, 적에게 축복을 내리는 얼간이도 있단 말이냐?" 필사적으로 외친 가인의 애원은 오히려 비웃음이 되어 돌아왔다. -콰쾅! 누군가 머리를 돌덩이로 후려친 것만 같은 충격이 달렸다. ----------------거짓말이야. 하나밖에 없는 왼쪽눈동자가 허공속에서 우뚝 멈추었다. 몸속에 남아있던 피들이 순식간에 역류한다. 서있는 것만이 다였던 힘없는 육신이것만 갑자기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의 은회색 눈동자속에 핏발이 서리기 시작했다. 여신이 내게 거짓말을 했다!!!!!!!!!!!!!!!!!!!!! -너를 사랑하게 되리라.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직 증오와 분노일 뿐이다. 사랑이 아니야! -현명하게 선택하는게 좋겠지. 여신의 축복따위, 모두 거짓이야! 내게 거짓말을 했어! 여신이 내게 거짓말을 했어! 고귀한 여신께서! 우리의 모신께서! 거짓말을! 거짓말을!!!!!!!!!!!!!!! "으아아아-, 차라리 죽여라! 나를 죽이면 모두 끝나 버릴 거야!!!!!!!!!!!!!!"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남아있었던 것일까? 내재된 분노가 한계이상의 힘을 끌어낸 것이 분명하다.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였던지라 병사들은 방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체가 발작을 일으키며 황제에게 달려들었다. 그를 부축하고 있던 병사들조차 너무나 의외의 몸놀림이라 미처 막지 못 했다. 피딱지가 앉은 상처투성이의 손이 황제의 화려한 망토자락을 잡았다. 그러자 황제의 눈동자속에 죽은자가 아닌, 살아숨쉬는 인간의 눈동자가 들 어왔다. 붉게 핏발마저 서린 눈동자가 당장에라도 황제의 육신을 찢어발기 고도 남을 것만 같았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맥박친 것은 그와 동시였다. "황제폐하!" "폐하!"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의 맥박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득달같이 달려든 근위병들에 의해 크세르의 왕자가 힘없이 떨려나갔다. 살기 가득했던 기세와는 달리 반항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미 한계에 다다른 그의 육체는 더 이상의 외침도 없이 검은장막 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자신을 부르는 피맺힌 동족들의 비명조차 뒤로 한 채, 그는 이글거리는 눈 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죽은 시체처럼 쓰러져버린다.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폐하-?!" 근위대장 하슈멜이 다급하게 황제를 불렀다. 그러나 황제는 오랫동안 멍청한 얼굴로 쓰러져버린 크세르의 왕자를 바라 보았다. 흡사 크세르의 왕자가 황제의 영혼을 삼켜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황제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괘................괜찮.." 그러나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얼굴또한 눈에 띄게 창백했다. 하슈멜은 저주로 인해 황제의 옥체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싶어 심장 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만 쉬시지요, 폐하. 뒷정리는 소인이 하겠습니다." 하슈멜이 급히 쓰러져버린 죄인을 근위병들에게 지하감옥으로 옮겨놓으라 는 손짓을 보냈다. 그러자 신속하게 죄인의 피칠갑된 몰골이 황제의 시야 에서 사라졌다. 황제는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하늘까지 치솟고 있는 연기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명은 이미 잦아들었지만 시뻘건 불길속에 아직도 사람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황제는 숨조차 쉬지 않고 달렸다. 황궁안에서 달리는 것은 품위없는 짓이라고 시종장 토라타가 늘 잔소리했 것만 그의 말을 되새길 여유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구릿빛 피부가 마치 크세르인처럼 하얗게 되도록 전력질주했 다. 이렇게 달리는 것은 꼴불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것도 자각할 수가 없었다. 다만, 가까이 다가온 은회색 눈동자와 단전까지 짜릿하게 자극하는 피냄새 가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는 떨쳐지지 않는 환상에 경악하며 아예 머리카락을 쥐뜯었다. -쾅! 황궁 중 가장 내밀한 그의 은신처인 침궁에 들어서서야 그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대체 왜? 아니..... 알고 있다. 왜 이러는지. 아직까지도 피냄새가 코 끝에 남아있었다. 달콤함까지 품고 있는......... 하지만-, 봤지 않느냐? 그것은 이미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끔찍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풍성했던 은발머리도, 투명하리만큼 하얗던 피부도 온갖 고문으로 인해 새 까맣게 짖물려 있었다. 치료를 해준들 이미 엉망이 되어 전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될 수가 없다. ..아............아름, 다워? 하-, 이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인가!!! 그런 단어는 여자들한테나 쓰는 말이다! 미치겠다. 미쳐버릴 것만 같다! 젠장할- 미쳐버릴 것만 같아-! "폐하?" 미친 듯이 서성거리면서 머리카락을 쥐뜯어대던 주르의 등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흠짓 놀란 뒤를 돌아보자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한 테렉산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 감정에만 파묻혀 있느라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나보다. 그는 온몸의 힘이 주룩 빠지는 것을 느꼈다. "테.....렉산." 허락도 없이 침궁에 들어온 테렉산의 무례를 탓할 새도 없이 주르는 무력 하게 테렉산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는 황제가 가장 믿는 자였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와서 무엇이든 스스럼없는 자. 비록 얼음처럼 냉정한 얼굴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그였지만 그래서 차라리 편한 자였다. 주르는 테렉산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여자들의 고운 분내와는 달리 사내의 거친 체취가 느껴지는 단단한 가슴 이었다. 테렉산도 가만히 주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피냄새가 난다......테렉산. 모두..........죽었느냐...?"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주르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은 대륙을 호령하는 황제가 아닌, 그저 18살짜리 소년의 목소리였다. "네." 소년의 물음에 테렉산이 짧게 답했다. "불타버렸지............. 재만 남았겠구나." 소년은 테렉산의 가슴에서 머리를 떼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였 다. 테렉산은 아무말 없이 소년의 까만 머리통을 바라보기만 했다. "난................아버지 같은 황제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테렉산 보다 약간 작을 정도인 소년황제가 억눌린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 였다. "피로 이룩된 제국이지만 덕으로 다스려 누구보다 아름다운 이상향의 나 라로 만들고자 했단 말이다! 그런데, 이게 뭐지? 이게 뭐냐?" 이미 어른이라해도 좋을만큼 육체는 다 자라난 상태다. 하지만 정신은 그 저 18년밖에 살지 않은 어린소년의 것이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태어날때부터 단련되어온 군주로서의 가면일 뿐이다. 어린 소년에게 학살이란 그만큼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을 죽였다!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었는 데 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뿐인가, 수간을 자행했으며 사마르칸 다의 다시없을 인재를 개밥으로 던져주었어! 이... 이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 테렉산, 내가 왜 이런짓을 저지른거지? 내가 왜-?" 한순간에 솟구친 화를 주체하지 못해 만행을 저질렀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그보다 더 잔인한 짓으로 증오하는 인간을 몇번이나 죽여버렸는지 모른다. 그 빌어먹을 크세르의 왕자놈을 산채로 껍질을 벗기고 동족의 바비큐를 입안에 쳐넣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상상이었을뿐............. 그러나 그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권력이 있었다. 참지못한 단 한순간의 화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버렸다. 여자들의 비명이 아직까지 귓가를 어지럽힌다. 경악과 공포로 얼룩졌던 해사화의 아름다운 얼굴, 그녀는 멀리서봐도 아름 다운 미녀였다. 하지만 죽여버렸다. 죽여버렸어. 내가. 내가. "피냄새가 난다. 피냄새야.. 피냄새가 진동을 해! 미란다.....나의 미란다가 있을 때 이렇지 않았어. 난 현명한 군주였다! 누구에게든 상냥했고, 화같은건 내지 않았어! 미란다가 나를 감싸주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녀를 바라보면 모든 격한 감정들이 부드럽게 풀어졌었다. 그런데 미란다가 죽어버렸어! 빌어먹을 크세르 잡것을 위해-, 나를 배신하고 죽어버렸어!!!! 미란다! 왜 날 배신했지? 왜 날 두고 가버렸느냐? 난 외롭다. 누군가 날 진정시켜줘야만 하는데 이제 누가 날 진정시키지? 누가 내 분노를 식혀줄 것이냐? 제길, 가슴이 또 두근거려! 부족해! 부족해! 부족하다고 마구 아우성이야! 뭔가 있어야 하는데...... 뭔가가 있어야만해. 그런데 빌어먹게도 그게 뭔지 모르겠다. 미쳐버릴 것만 같아! 나... 난 미쳐버린 걸까.. 그래서 사람들을 죽이고......... 난 그저 미란다와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피에 굶주린 야만족 사마 르칸다가 아니라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고 싶었을 뿐이야! 그속에는 나와 미란다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미란다는 없어! 나의 미란다가 없다! 이젠 나조차도 없어!" 소년은 미친 듯이 외쳤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검은눈동자속에는 눈물마저 어려있었다. 하지만 테렉산은 여전히 표정조차 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럼에도 소년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외쳤다. "가슴이 뻥 뚫려버린 것만 같아.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한데.... 하지만 미란다가 아니야! 뭔지 모르겠다, 뭔가가 부족해."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쉴새없이 쏟아지더니 다시 침궁안을 왔다갔다하며 불안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 더 이상의 피는 필요없어. 하지만, 들끊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견딜 수가 없어. 부족해. 뭔가가 없는데 그게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뭐냐, 뭐가 날 이렇게 둘쑤시는 거지? 미쳐버릴거다. 이대로면 미쳐버리고 말거야." 한참을 서성이던 주르가 뭔가 떠오른 듯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황망한 시선으로 테렉산을 바라본다.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테렉산의 얼굴을 바라보며 주르는 멍한 목 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주다." 순간이었다. 주르의 검은눈동자속에 분노가 떠오른다. "이게 바로 크세르놈의 저주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깡그리 태워버릴 것만 같은 증오가 불길처럼 치솟아 올랐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번개처럼 움직여 벽에 장식처럼 걸려 있던 검을 뽑아든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야말로 한순간의 일이었다. 주르가 달리기 시작하자 테렉산도 황급히 뒤를 따랐다. 어둠속에서 주르를 수호하는 그림자역시 보이지 않게 움직였다. "폐, 폐하?"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달려나가는 황제의 용안에 깜짝 놀란 토라타가 비명 처럼 소리쳤다. 그러자 달리는 와중에도 고개를 획 돌린 황제가 쩌렁한 목 소리로 고함쳤다. "따라오지마라! 따라오는 자가 있다면 베어버릴 것이다!" 너무나 살기넘치는 황제의 모습에 아무도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테렉산만이 황제의 명을 거슬리면서 달렸다. 죽여버린다. 죽여버린다. 죽여버린다. 죽여버린다. 죽여버린다. 죽여버린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죽/여/버/린/다. 지하감옥, 갑자기 쳐들어온 방문객으로 인해 세세칼은 흉악한 얼굴이 무색 하리만큼 놀래자빠졌다. 한번도 황제를 제대로 뵌 적은 없지만 그가 황제라는 것은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땀에 흥건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분명한 황제였다. "죄인은 어디 있느냐?"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몰아쉬면서도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동자는 꺼지지 않는다. 제아무리 흉악한 세세칼이라 할지라도 제국의 지존이신 황 제께 비할바가 아니다. 그는 고개를 바닥까지 조아리며 간신히 입을 열었 다. "어..어떤 죄인을 말씀하시온지.." "크세르의 개 말이다!!!!!!!!!!!!!" 쩌렁-, 분노를 담은 황제의 목소리가 지하감옥 전체를 무너뜨리기라도 하 듯 엄청나게 울려퍼졌다. 세세칼과 고문관들이 절로 히엑, 하는 신음을 삼켰다. 황제가 들고 있는 시퍼런 칼날이 더욱 음산하게 빛났다. "이, 이쪽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사지를 겨우 가다듬으며 세세칼이 가장 깊은 지하감옥으 로 황제를 안내했다. 그리고 굳게 닫힌 철문앞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음산한 금속음이 울리며 철문이 스르륵 열렸다. "모두 나가라. 한놈이라도 남아있을시엔 그놈의 목은 물론이고 가족들까 지 베어버릴 것이다."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황제의 목소리에 세세칼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황제가 감옥안으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꽁지가 빠져라 밖으로 뛰쳐 나갔다. 고문관들은 물론이고 감옥을 지키는 문지기들까지 대동하고. 끼이익.... 철문이 열리고 황제는 천천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장에라도 목을 따버릴 것 같은 흉흉한 살기가 황제의 전신을 덮고 있지 만 다급함은 한풀 꺽여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음습한 감옥안을 둘러보았 다. 사방이 차가운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금방 차가운 돌바닥에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크세르왕자를 발견했 다. 여전히 몸에 걸친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짚단조차 깔리지 않은 차가운 돌바닥에 화상과 매질로 엉망이 된 육체가 짐짝처럼 구겨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르의 눈에는 아무런 동정도 깃들여있지 않았다. 그는 훌륭한 장인의 솜씨로 단련된 시퍼런 칼날을 고문으로 인해 다헤져 빠진 왕자의 목덜미에 겨누었다. 칼로 찌를 필요없이 발로 한번 차기만해도 금새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몰골이다. 다시 한번 피냄새가 느껴졌다. 비릿하고 지저분한 냄새다. 적의 한가운데, 고작 칼한자루 숨기고 단신의 몸으로 들어왔던 용감한 사 내는 그저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고깃덩어리가 감히 황제를 저주했다. 이상향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황제의 원대한 포부에 찬물을 끼얹은 것 은 물론이거니와 가장 사랑하는 여인조차 앗아갔다. 주르의 각진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시 한번 살기가 치솟는다. 저주의 시전자, 그를 죽여없애버리면 의외로 쉽게 저주가 풀릴지도 모른 다. 또한 어쩌면 영원히 풀 수 없을지도... 그러나 마냥 살려두고만 있기에 위험수위가 목끝까지 다다라 있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꿈, 미친 듯이 발작해대는 가슴과 이 유모를 목마름, 불안감...... 모든 것이 다 이 더러운 고깃덩이 때문이다. 어찌 살려둘 수 있단 말인가? 죽음과도 같은 고문따위 필요없다. 차라리 죽여 없애버리자. 화근따위 아예 잘라버려! 황제는 번뜩이는 칼날을 힘껏 위로 곧추세웠다. 이대로 칼을 아래로 떨구기만 하면 단번에 죽어버릴 것이다. ----헌데 왜였을까. 주르는 칼을 곧추세운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낮은 목소리였지만 너무나 조용한 지하감 옥안에서라면 누구라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내게 건 저주가 무엇이었느냐?" 마치 마지막 기회라는 듯이 그가 물었다. 어차피 자비를 베풀 생각따위 전혀 없으면서. 하지만 질문은 이미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답따위는 이미 필요없음에도.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변화가 생겼다. 죽은 듯이 구겨져 있던 크세르왕자의 눈이 흐릿하게 떠졌다. 하나밖에 없는데다가 썩은 생선처럼 흐려진 눈동자가 기운없이 황제를 바 라보았다. ---------------- 챙그랑-...............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주르피오황제의 용안이 형용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두근! 황제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두근! 피냄새와 유황냄새로 가득한 지하감옥이었는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향기 가 황제의 코속을 휘감았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점점더 거세게 박동하며 사향냄새가 더욱 지독하게 풍겨졌다. 주르피오황제는 더욱 고통에 찬 모습으로 얼굴을 일그렸다. 마치 전신에 칼날이 박혀버린 사람처럼 그는 눈을 부릅뜨고 미간을 일그 리며 고통을 나타냈다. 그의 고통스러운 눈동자가 피냄새를 풍기며 썩어가는 시체를 뚫어지게 바 라보았다. 그것은 이미 시체였다. 간신히 숨이 붙어있어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끔찍한 시체였다. -연가를 불러보아라.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사랑찬가'는 어떠 한가? -푸른 나무가지의 종달새처럼, 새벽의 광명을 밝혀주는 태양처럼, 그대, 내게 말해주오, 내 사랑은 오직 당신뿐이라고...... 내 사랑은 오직 당신 뿐이라고................... 그의 눈동자는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은 신비로운 은회색이었다. 크세르인들에게조차 드믄, 마치 이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은회색이었 다. 그곳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담겨 있었다. 얇지만 부드러운 선으로 이루어진 자주색 입술에선 남자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맑고 청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누구라도 눈물짓게 만들 수 있는 마력같은 신비함이 내포되어 있 었다. 천상의 목소리라 했던가..... 저 무식스런 용병들조차도 눈물을 짓게 만들었던 노래와, 은은한 하프소 리. 그래, 솔직히 나도 울고 싶었다. 가슴속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저 맑은 울림은 누구라도 눈물짖지 않을텐 가......... 은회색 눈동자가 자신의 검은눈동자를 응시한다. 그와 함께 얇은 입술이 곡선을 그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얀 피부속에서 붉은 피빛의 보석이 유혹처럼 반짝였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했다. -----------내 사랑은 오직 당신 뿐이라고. 고통속에서 인내하던 주르의 육신이 끝내 허물어져 버렸다. 그는 줄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동시에 피비린내를 풍기는 크세르왕자의 육체를 와락 껴아았다! 까칠함과 더불어 비릿한 피냄새가 풍기는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친 것 은 순간의 일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정말로 미쳐버린 인간처럼 시체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 다. 동시에 사정없이 맥박치던 심장에 터져버릴것만 같은 환희가 차올랐 다. 찾았다! 찾았어! 저 흐릿한 은회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는 단숨에 깨달아버렸다. 차라리 울고 싶었다. 황제라는 고명하고도 거룩한 신분따위 상관없다. 한번 깨달아버린 머리는 이성의 통제를 무시하고 터져버린 둑처럼 감정을 마구 쏟아냈다. 실로, 오랜만에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내여 울어버리고 싶었다. 무언가가 없다. 분명 있었는데, 갑자기 없어져버렸다. 그게 무어지? 대체 그게 뭐냐? -미란다가 없습니다. -아니야, 미란다 따위가 아니야! -없어. -없어------ -아니, 있다. -바로, 여기에. 누군가 이 광경을 본다면 기괴함의 차원을 넘은 엽기의 정점이라고 표할 것이다. 아니, 끔찍함? 역겨움? 뭐라해도 다 들어맞는 말이리라. 왜냐하면 시체와 섹스하는 인간이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을테니까. 하지만 아직 그것은 살아 있었다. 분명, 살아있었다. 여인의 부드러운 입술이 아니었다. 껍질이 다 일어나고 피조차 머금은 입술이다. 군데군데 고름조차 딱지앉아 저 입술에 키스하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주르는 세상 다시 없을 환상적인 입맞춤을 느꼈다. 입술에 마주한 혀는 곧장 아무런 방해없이 뻥뚫린 안으로 짖쳐들어갔다. 입천장을 훑고 혀를 감아도 상대는 아무런 반응조차 없다. 어쩌면 느낌조 차 없는지도 모른다. 이빨조차 없이 생잇몸만이 느껴지는 휑한 입안이었으며, 그나마 피냄새가 진동을 하것만 그마저도 남성을 자극하는 사향냄새로 바뀌었다. 키스는 더욱 농밀해지며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을 마구 휘젖는다. 그때마다 한웅큼의 머리카락들이 손가락에 걸려 뽑혀졌지만 자각할 수조 차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감동, 그리고 더할 수 없는 쾌감 뿐이었다. -----찾았다! 오직 그것만이 황제의 가슴에 꽉차 있었다. 언제나의 꿈처럼 그는 여전히 향기로웠으며 아름다웠다. 농밀한 입맞춤이 이윽고 왕자의 전신으로 향해졌다. 아무런 반응조차 없는 시체의 전신을 혀로 핥고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움직였다. 이미 썩기 시작한 살점들과 피고름들이 입안으로 들어온다해도 상관없었 다. 상대가 쾌락을 느끼든 말든, 그것이 이미 시체라해도 상관없다. 오직 사랑하고 싶었다. 이 사랑스러운 육체를 자신 안에 담고만 싶다. 피맛따위, 썩은 고름냄새따윈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미 짖물릴대로 짖물려버린 유두를 혀로 핥고, 반쯤 잘라져나가버린 페니 스를 애무했다. 일상의 섹스라면 자지러질만큼 쾌감을 느낄만한 부분들이 었지만 그보다 더한 고통에 감각마저 마비되어버린 왕자의 육체는 아무것 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미 이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나 목말라했던가, 또한 얼마나 아니라고 부정하며 분노로 시간을 태웠 는지 모른다. 그 모든 제약과 규제들이 풀려버린 지금, 이성이란 실날조차 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윽고 폭풍과도 같은 애무가 끝나고 이미 성이날 대로 성이난 주르의 젊 은 육봉이 엉망진창으로 찢어발겨진 왕자의 항문을 꿰뚫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던 육체가 잠시 펄떡 뛰었다. 그순간만큼은 확실히 느낌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뿐. 왕자는 보이지 않는 어둠을 흐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눈을 뜨고 있지만 보이는 것은 없다. 느낌조차 마취되어버린 현재 그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누군가 자신의 뒤를 거칠게 쑤시고 있다는 것뿐이다. 전신이 둘로 쪼개졌다. 꽉 막혀있는 살점들이 무언가로 쑤셔박히고 또 내빼다가 다시 한번 쑤셔 박힌다. 그러나 이미 고문으로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몸은 고통조차도 제대 로 느낄수가 없었다. 아니, 분명 아픔은 있다. 미칠 것 처럼 아프지만 그것 이 진짜 고통인지조차도 알 수 없을뿐이다. "허..........억, 헉...." 본능처럼 가느다란 신음만이 흘러나올뿐. 그의 몸은 고문관이 하는대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저 새로운 고문법인가 하는 건조한 생각마저 들었다. "으흐흐흑!" 그러나 건강한 사람에게 느낌이란 너무나도 생생한 것이다. 사지를 압박하는 엄청난 쾌감에 주르는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으흐흑!" 눈물이 폭포수가 되어 사정없이 쏟아져내렸다. 위대한 황제, 용맹한 사마르칸다의 사내에게 눈물이란 어처구니없는 것이 다. 그런건 계집들에게나 있는 거라고 듣고 배웠다. 그렇기에 철들고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주르였다. 미란다가 죽었을 때 울부짖었지만 그때의 눈물과는 다르다. 주체할 수 없는 쾌감이 만들어낸 눈물이다. 너무 늦게 알아버린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눈물이다. "내 것이다." 주르는 흐느끼면서 속삭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왕자의 상체를 받쳐들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넌, 내 것이야" 바람결에 은백색 머리카락이 날린다. 찬란한 태양빛을 받으며 심연을 담은 은회색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그리고 아름답게 미소지었다. 이어 자주빛 입술이 달싹이며 노래를 부른다. 끝이 없을것처럼 펼쳐진 초원속에서 주르피오는 지긋이 그를 바라보며 노 래를 들었다. 아름다운 목소리........ 사랑스러운 사람.......... 넌 내 것이다. 절대 죽게 하지 않아. 아름답지 않아도 좋다. 손목따위, 눈이 없어도 상관없다. 얼굴이 흉직하면 어떠한가. 다시는 맑은 목소리로 노래부르지 못한다해도 상관없어. 이것이 저주의 실체라해도. 그래, 그렇다해도.........................상관........없다. 그는 쌓여있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분출했다. 사랑하게 되리라. 인생의 단 하나, 유일한 반려로써. 사랑하게 되리라- 사랑하게 되리라- 13. 눅눅한 지하감옥안, 어울리지 않는 정사의 냄새가 피비린내와 섞여있었 다. 주르피오는 거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직 어두컴컴한 시야속에 미동조차 없이 쓰러져 있는 시체의 윤곽이 떠 오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짖뭉개진 시체의 가슴을 더듬었다. 미약하지만 뛰고 있었다. 그는 아주 소중히 시체를 품안에 안았다. 그리고 입술에 또한번의 키스를 한다. 여전히 피맛이 났지만 아랑곳없이 가볍게 입술을 마주대고 잠시후 떨어졌 다. 그런후, 시체를 조심조심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현기증이 났지만 그는 망설임없이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횃불속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피곤함에 지쳐 창백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푹 꺼져버린 검은눈동자속에는 더 이상의 살기도, 분노조차 없었 다. 다만 초점조차 명확하지 않을만큼 멍해있었다. 무언가에 홀린것만 같다. 몇발자국 떼었을까, 그는 목석처럼 반듯하게 서 있는 테렉산과 마주쳤다. "........의약사들을 불러 그를 치료토록하라." 언제나처럼 냉정하게 가라앉은 테렉산을 바라보며 주르피오가 입을 열었 다. 지독하게 갈라지고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슬픔이 느 껴지는 음색이었다. 말을 마친 주르피오는 약간 절뚝이는 걸음으로 테렉산을 지나쳐 지하감옥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미 하늘은 컴컴한 어둠속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하감옥과는 달리 차갑고 맑은 공기가 피곤한 머리속을 깨끗이 정화시켜주는 것만 같았다. 주르피오는 빨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지긋이 누르며 촘촘하게 박혀있는 별 들을 바라보았다. 광활한 별들의 바다에 비해 그가 다스리고 있는 영토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그러나 치열한 삶이 여기에 있다. 먹고, 먹히고 증오하며 찢어발기면서도 그속엔 사랑이 있다. '위대한 황제가 될 겁니다. 아버지가 펼쳐준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열겠습니다. 나는 할 수 있습니다.' 어린 황제는 별들을 바라보며 끝없이 되뇌여왔던 자신의 포부를 다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을 손바닥으로 감싼다. 아직까지 흥분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심장이 가볍게 뛰고 있었다. -미친자라 하겠지. 하지만 내 것이다. 저주를 풀 길이 없다면 차라리 소유하겠다. "크세르왕자를 별궁으로 모시도록 하라." 대전으로 향한 황제가 시종장 토라타를 보자마자 한 말이다. 토라타의 작은 눈이 찢어질 듯이 커다래졌지만 황제는 반복하지 않았다. 비록 별궁이 후궁들만이 거처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라해도, 명령을 번복 할 생각따윈 없었다. "그가 죽는다면, 먼저 너희들 목부터 떨어질 것이다." 너무나 황당해서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는 토라타에게 협박과도 같은 일침 을 덧붙인다. "황제께서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것인가???!!! 죄인을 별궁으로 옮기라니!" 지하감옥으로 내려가며 토라타가 자신을 보좌하는 시종에게 불만을 토로 했지만 "글세 말입니다"라는 허약한 답변만이 돌아올 뿐이다. 결국 머리한구석에 황제가 미친 것이 아닌가하는 불경한 생각이 떠오르기 까지 한다. '감히, 무슨..'이라고 황급히 도리질을 하지만 도무지 말도 안되는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흉악한 지하감옥에 다다라 죄인의 감옥을 찾았을 때, 토라타는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오를 것 같은 경악을 체험해야 했다. 죄인이....... 사라졌다. 황궁이 발칵 뒤집어졌다. 토라타의 보고를 받은 황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하감옥으로 뛰쳐내려 갔을 때 그가 목격한 것은 점점이 흩어진 핏자국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범인의 행적을 그리듯이 지하감옥의 출구를 비롯해 바깥으로 까지 이어져 있었다. 자국이 지나간 자리마다 경비병들의 싸늘한 시체가 발견되었다. 교묘히.. 아주 교묘히 막 교대가 끝났을 무렵의 허술한 시간을 틈 탄 기습이었다. 죽어있는 자는 상대의 살기를 알아차리지도 못했던듯,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단지 양 미간에 박힌 암기만이 갑작스런 기습이 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한꺼번에 다섯명의 경비를 죽일 수 있는 고수란 흔치 않다. "테렉산은 어디에 있느냐" 경비들의 시체들을 바라보며 주르피오황제가 싸늘하게 말했다. 박력있게 소리친 것도 아니고, 추궁하는 뜻이 담겨있지도 않았지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오히려 더욱 공포심을 자아낸다. 토라타는 제 잘못이 아님에도 손가락까지 부들부들 떨며 겨우 입을 열었 다. "테..테렉산님은 지하감옥에 가신 이후 뵌 적이...." "테렉산을 찾아라." "네, 넷?" "황궁의 지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샅샅이 찾아보란 말이다!" 황제의 일갈이 터지자 황궁안의 모든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황궁안을 빠져나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의 출입을 통 제하고 경비를 강화하라! 황궁을 빠져나갔다해도 쉽게 마샤카를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황명없이 마샤카를 빠져나가는 자들은 누구를 불문하고 참수하라! 시간이 지날수록 명백해진다. 테렉산이.... 황제를 배신했다. 그가 아니고서 그 누가 네켈시아르 황궁을 단신으로 빠져나갈 수가 있겠 는가! 감히 황제의 병사들을 죽이고, 죄인을 빼돌렸다. 감히! 그러나 왜? ....이유는 모른다. 허나 그는 황제가 가장 믿는 자였다. 미란다 다음으로 총애했으며 가장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았던 자다. 냉정하고 차가운 얼굴의 소유자였지만 누구보다 황제에게 충성하는 자라 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그가- 황제를 배신했다. "감히.......감히 네놈이........ 테렉산 네놈이------" 황제의 분노는 그어느때보다도 극심했다. 이 손에 있었다! 품에 안았으며 입술이 맞닿았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단 한순간에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설레임 따위가 아닌 불안과 초조, 그리고 못 견딜만큼의 그리움으로 숨조차 쉬지 못할 지경이다. "놓아라, 내가 찾으러 갈 것이다! 내가 직접 찾으러 갈거란 말이다--!!!" "폐하, 아니되옵니다. 폐하! 진정하소서!!" "멍청한 것들 같으니라고! 니놈들이 제대로 하는게 뭐가 있단 말이냐! 내가 찾겠다! 내가 찾으러 가야만 한단 말이다-------!!!" 의자들이 내동댕이쳐지고 또다시 온갖 장식품들이 깨졌다. 그 와중에도 토라타를 비롯한 시종들이 황제의 발광을 막느라 필사적이다. "폐하, 진정하소서! 바깥은 위험하옵니다. 부디 진정하시옵고..." "죽고 싶으냐, 이 잡것들!" - 위대한 황제가 될 겁니다. 아버지가 펼쳐준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열겠습니다. 나는 할 수 있습니다. 쉬이익! "억?!" 핏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꺄아아악!" 비명소리와.. "폐..............ㅎ.......ㅏ...?"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다랗게 뜬 눈. 피의 황제. 미친 황제. 광황제(狂皇帝). "죽어버려라, 못난것들! 차라리 다 죽어버려-----!!!!!!!!!" 심장이 뛴다. 끝도 없이 펼쳐진 아득한 길을 그저 달려야만 하는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호흡조차 불안정하다. 두근대며 뛰는 심장의 울림과 함께 전 신을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막막함 속에서 그는 울부짖었다. ******* 그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눈에 보인 것은 사지가 절단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토라타의 시신이었다. 주변에는 몇 명인지 모를 시종들의 시신조각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 위대한 황제가 될 겁니다. 아버지가 펼쳐준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열겠습니다. 나는 할 수 있습니다. 이상향의 나라를................. 대 제국 사마르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둘러쓴 황제는 초점이 없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 보았다. 자신의 피가 아닌 타인의 피가 손 끝에 맺혔다가 아래로 툭,툭,툭 떨어진다. 피냄새가 진동하는 대전에서 황제는 오로지 혼자 멍한 모습으 로 서 있었다. 마치 영원처럼. 이것이 광황제 전설의 전말이다. 14. "그래서 왕자는 어떻게 되었어요?" 어느새 높이 뜬 해가 소년의 해맑은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소년은 붉어지려는 눈에 힘을 주었다. 덕분에 눈물을 보이는 꼴사나운 짓 은 막을 수 있었지만 울먹이는 목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글세, 그에 관한 얘기는 들은적이 없어서..." 금실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여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소년이 코를 훌쩍이며 소리쳤다. "마, 말도 안돼요. 촉복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단 말이에요? 그런게 어떻게 축복이에요?" "...그래도 그건 축복이었단다." "무-" "때론 신조차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법이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힘이란 언제나 대가가 따르는 법, 여신은 잠시 그 점을 간과했는지도 몰라" 뭐라고 항의하려는 소년의 말을 자르고 여자가 읖조렸다. 그리고 아련한 시선으로 먼 곳을 바라본다. 어쩐지 슬퍼보이는 모습이라 소년은 더 이상 항변하지 않았다. 대신 소년도 그녀가 응시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 아래 산줄기들이 울퉁불퉁 제각각인 모습으로 가만히 자리하고 있었다. 저 안에는 다람쥐들이 도토리를 찾아 쪼르륵 달릴 것이고, 새들이 소리높혀 지저귈 것이다. 어쩌면 흉악하다는 링가가 고라니를 잡아먹고 있 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자리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 에서 얼마나 치열한 삶이 펼쳐져 있을까... 잡아먹고, 먹히고..... 죽지 않기 위해 죽이는.... 그러나 때로 사랑하며 아파 하고 행복하기도 한..... 나름대로의 사연들이 담겨 있을 것이다. 아직 가보지 않은 저 먼곳에서는. "왕자는 아마 죽었을거예요." 침묵하던 소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여자가 소년을 살풋 바라 본다. 그리고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오래전 일이니까...." 그토록 악명을 떨치던 광황제조차도 죽어 흙이 되었다. 그야말로 아주.......아주 오래전의 일이니까. 그녀의 말에 소년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그녀가 낮은 곡조로 허밍을 시작하자 입을 다물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들이 그녀의 허밍에 맞춰 춤을 춘다. 소년은 눈부시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무를 해서 집에 가야한다는 생각조차 잊을 만큼 한가롭고 한가로운 산 속의 오수였다. 사마르칸다 제국력 68년. 광황제 사후(死後) 8년이 지난 해였다. 라라라........라라라...... 슬픈 이야기가 하나 있답니다. 사랑이야기는 아니에요. 아니, 어쩌면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라라라...라라라..... 하지만 그건 아주 먼 옛날의 일이랍니다. 애타는 사연의 당사자 모두가 이제는 한줌 흙이 되어버린 아주 오래전 일 일 뿐이에요. 소년은 단지 화가 났을 뿐이었답니다..... 자신의 무력함이 못견디게 슬펐을 던거예요. 그래서 바랬던 소망이 생각지도 못한 크나큰 재앙을 몰고 왔지 요. 라라라....라라라.............라라라라.............. 소년의 소망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었어요. 아름다운 크세르인들........그 찬란한 빛의 민족들이 갓난아이부터 나이먹은 어른들까지 불길속에 사그라들었다지요. 그 다음 황궁과 성문을 지키던 경 비들이... 그들은 물론, 자손들까지 끊는 물속으로 사라졌답니다. 그 다음 순서로 집시들이 끌려갔어요. 모진 고문을 받으며 그들또한 사라졌지요. 왜냐하면 그들이 소년을 데려갔다는 것을 '그'가 알았거든요. 네, 그들이 소년을 데려갔답니다. 어느 추운 밤, 움울한 가랑비가 하늘하늘 내리는 그 밤에 시린 눈을 가진 사내가 차가운 소년의 육신을 안고 높은 담을 넘었답니다. 라라......라라라...... 왜냐하면 시린눈의 사내는........ 사랑하고 있었거든요. 그 여자를. 그래서 거절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 여자의 부탁을............................... -----부탁해, 테렉산! 15. 저녁때까지만해도 맑았던 하늘이 깊은 한밤중이 되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새벽녁에는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테렉산은 비를 맞으며 쉼없이 달렸다.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명마는 주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번개처럼 달렸 다. 이윽고 사방이 전나무로 가득찬 숲속에 도달해서야 말의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는 숨 고를 새도 없이 땅으로 내려섰다. 그앞에는 마차 두 대가 서 있었다. 말 울음소리를 들은 희끗한 노인이 마차밖으로 머리를 내밀다가 테렉산을 발견하고 반색이 되어 나온다. "나으리!" 가닥가닥 땋은 머리와 허름한 옷차림, 그리고 사마르칸다인보다 좀더 희지 만 그렇다고 크세르인처럼 완전히 흰편은 아니다. 그는 집시이기 때문이 다. 노인이 밖으로 나가 테렉산을 맞이하자 마차안에서 올망졸망한 머리들이 튀어나온다. 그러나 어른들이 야단치자 금새 쏙 들어가버린다. "이 길로 떠나라" 테렉산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명령하며 말잔등위에 푸대처럼 얹어있는 것 을 마차안으로 집어넣는다. 그러자 마차안에 있던 사람들이 안으로 인도한 다.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되어 있었던 듯, 아무런 의문도 표하지 않는다. 할 일을 마친 테렉산이 품안에서 두툼한 자루를 노인에게 휙 던졌다. 엉겹결에 받아든 노인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휘청였지만 곧 자세를 바로한다. "머뭇거리지 말고 되도록 신속히 마샤카를 떠나야 한다! 쉬지말고 항구가 있는 루인까지 가라. 알겠느냐?" "예, 명심하겠나이다." "그럼 어서 가라!" 테렉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노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일어나라, 출발할 것이야!" "엄마, 이게 뭐야?" 서둘러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한 아이가 궁금증을 못이기고 중년여성에게 물었다. 아이도 엄마도 집시들의 전통에 따라 가닥가닥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여자는 아이의 천진한 질문에 굳은 표정으로 답한다. "몰라도돼" "이상한 냄새가 나" 다른 아이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주변의 아이들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둘둘말린 푸대자루를 툭툭 건드려본 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하얀 실뭉치를 발견하고 살짝 잡아당겼다. "어, 이거 뭐야?" 잘 잡아당겨지지 않자 좀더 힘을 주었다. 그러자 실뭉치가 뭉텅 빠지며 아이가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아야야.." "억?!" "꺄악?!" 엉덩방아를 찧자마자 들려온 경악성에 아이가 휘둥굴한 얼굴로 푸대자루 를 보았을 때 그 속에는 화상으로 짖뭉개진 시체의 얼굴이 튀어 나와 있 었다. "으아악~~" "쉿, 조용히 못해!" 그때까지 한곳에 잠자코 있던 어른들이 일제히 아이의 입을 막았다. "살아 있는가?"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덜컹거리는 마차와 흔들리는 등잔불탓에 어느때보다 음산했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숨소리조차 내지않고 침묵했다. 시체를 본 순간 어째서 자신들이 야밤을 틈타 성문을 나서야 하는지 이해되어던 것이다. "지독하군." "세상에.." 푸대자루를 펼쳐보던 어른들이 지독한 시체의 몰골에 눈살을 찌푸렸다. 여인들이 아이들의 눈을 가려버릴 정도다. 그러나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것은 짖뭉개진 상처나 채찍자국 따위가 아니 었다. 이렇게 철저히 망가진 모습임에도 시체의 아랫도리를 흥건히 적시고 있는 저것은 분명히 토정액이었다. 앞이 아닌 뒤에서부터 이어진 것으로 보아 자기자신의 것이 아닌건 분명할터. 어떤일이 시체에게 있었는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시체와 섹스를 한단 말인가!? 전율적이다 못해 공포스럽기조차 하다. 처음 높으신 귀족님이 죄인을 빼돌리면 억만냥에 버금가는 재물을 주겠다 했을 때 약간 긴장했을뿐, 이렇게까지 놀라진 않았다. 사실 집시패들을 이용해서 죄인을 빼돌리는 것은 그다지 드믄일도 아니었 다. 세계 곳곳을 돌아 다니는 만큼 지리에 밝은 그들은 어떻게 하면 몰래 성문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또는 추적자들을 피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죄인의 죄명이나 의뢰자의 신분은 철저히 불문율에 부친다. 그들은 그저 의뢰받은 일을 할 뿐이니까. 그런 과정에서 이처럼 끔찍한 몰골의 죄인들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정액 투성이로 맡겨진 죄인은 없었다. -여자가 아니고서야...- 그러나 항상 긴장속에 살아온 그들이기에 곧장 감정을 수습하고 시체의 상태를 살폈다. 헌데.. "이 사람, 아직 살아있어요!" 멀어지는 마차의 잔영을 바라보며 테렉산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랑비에 머리는 물론이고 옷까지 흠뻑 젖어있는 채였다. 그럼에도 그는 비를 피할 생각조차 없이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붙박히듯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의 건조한 눈빛이 애마에게로 향했다. 이윽고 애마를 장식하고 있던 모든 부속품들을 떼어내기 시작한다. 말안장 은 물론이고 장식품들까지 모조리 떼어내자 애마는 마치 야생말처럼 알몽 뚱이가 되었다. 테렉산의 건조하고 무표정한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허나 그것은 찰나의 순간, 금새 평소처럼 생각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 된 다. 철썩! 모든 과정이 끝난후 그는 힘껏 채찍으로 말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깜짝 놀란 말이 저만치 달려가버리지만 이내 뒤돌아 그를 바라본다. 동시에 천지를 후려칠 것 같은 천둥소리가 콰쾅 울렸다. 그 소리에 깜짠 놀라버린 말은 전나무숲 안쪽으로 달려가버리고 만다. 천둥소리가 울린후 움울한 빗줄기가 조금씩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쏴아아아-------- 테렉산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천천히가 아닌, 무릎관절을 완전히 꺽으며 급격히 바닥으로 침몰한 것이 다. 허나 등은 꼿꼿이 세워있다. 그는 한치 표정의 변화없이,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 했다. 그리고 내리꽂히는 빗줄기를 맞으며 서서히 고개를 든다. 비가 전신을 때린다. 테렉산의 육체를 그대로 꿰뚫어버리듯이. 그는 꿇어안은 자세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웃었다. 높거나 늦은 흐느낌조차 없이, 그저 표정만으로 웃었다. -미란다, 부탁대로 했다. 그러니까 너는 이제...... 내 아/내/다. 집시들에게 떠맡긴 왕자가 계속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여부는 별로 중 요하지 않다. 특별히 그를 동정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는 그녀의 부탁을 이행한 것 뿐이었다. 처음부터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여인..... 황제조차도 첫눈에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여인......그러나 마찬가지로 단숨에 사랑에 빠진 사내가 여기 또 하나 있었다. 또한 그녀조차도 첫눈에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사내......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보아서는 안되었다. 단지, 스치듯 마주치는 눈길과 아주 찰나의 순간,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남몰래 저질렀던 짧은 키스만이 전부였다. -부탁해, 테렉산. 그때 역시 말로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 대화란 언제나 남 몰래 나 누는 눈빛만이 전부였기에... 그것은 한순간에 배신자로 전락해도 좋을만큼 소중한 주문이었다. 이제는 정당하게 그녀의 손을 잡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녀는. '너는 내 아내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는 한치의 미동조차 없이 영원히, 영원히 움직이지 않았다. 우르르르릉------------ 쏴아아아아아........................ 누군가의 눈물처럼, 절규처럼 비가 대지를 적신다..... 라라라.....라라라................ 라라라............................... end 여기까지 읽어주신 당신은 진정코 저의 독자십니다. ㅠㅠ